"13년의 별거를 졸업하고 은퇴한 아내의 집에서 다시 동거를 시작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빨간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제목, 젊고 아름다운 얼굴과 흐른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 타원형 액자 속 사진처럼 대각으로 놓인 앞표지의 느낌은 강렬하면서도 차분하다. 저자는 헤이리에서 모티프원(Motif#1)이라는 북스테이를 짓고 운영하며 서울에서 일하는 아내와 떨어져 살았고, 은퇴한 아내의 섬 여행에 동행했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의 작은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40년 이상 보관했던 필름들을 꺼냈고, 오랜 사진들과 이야기들을 ‘부부의 시간’ ‘가족의 시간’ ‘아내의 시간’으로 기록했다.
부부의 동거는 은퇴 이후의 해외 장기체류 계획이 불가능해진 아내와 연극하던 딸에게 자신의 자리를 맡길 수 있었던 남편의 사정 덕분에 가능했고, 이는 팬데믹의 수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은퇴한 아내는 북한산이 가까이 보이는 작은 월세집에서 가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는 동안 미뤄두었던 여러 활동과 여행, 명상을 하며 살고 있었다.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이 고수하는 원칙은 ‘간섭하지 않는다’와 ‘단순하게 산다’는 두 가지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의 군 복무와 40대 중반의 유학, 장기 출장과 이후 모티프원에 이르기까지 부부는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다. 돈 버는 재주가 없는 남편의 빈자리를 아내는 간호사로 일하며 대신했고 어려서 시골의 시부모님께 맡기기도 했던 아이들의 주양육도, 노령의 시부모와 치매를 앓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돌보는 일도 아내의 몫이었다고 한다. 13년만의 동거는 아내가 온전히 홀로 살기 시작한 지 5년만의 일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먹는 것에 관해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의 생각과 실천을 따르기로 한 부부의 이야기가 이들이 지향하는 삶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식탁 앞에서 아직도 간혹 '맛있다'는 소리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어떤 약속을 잊었는지 서로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생명이니 생명을 두고 '맛있다, 맛없다'는 표현은 하지 않기로 했음을 말입니다."(24쪽) 인상적이었고, 이 책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너무 명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겠다 싶었다. 부부는 재료의 조리 과정을 줄이고 하루에 두 번, 1식 2찬의 식사를 하고 외식도 가급적 삼가면서, 간소한 식탁에 마주앉아 다양한 주제의 긴 대화를 나눈다. 살면서 느끼는 공허와 무의미함을 말초적인 감각과 순간의 포만감으로 대신하며 '맛'과 '먹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일상과 그를 부추기는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삶은 더 자유롭고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가볍게 먹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부의 식탁에 비하면 나는 늘 진수성찬이라는 것도 살짝 마음에 걸렸다.
한 세대를 넘어선 부부, 가족, 아내의 시간과 과거의 사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지만 회고담이라는 느낌보다 저자의 관점과 내면을 통과한 현재적 기록으로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만 쉽지 않은 가치지향적이고 단순하고 정갈한 삶을 살아가는 부부의 일상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편안했는데, 그들의 이력이 아주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결심'과 '노력' 사이에 놓인 수십 년의 하루하루가 쌓인 결과인 현재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큰따옴표로 옮긴 대화들이 상당히 많은데, 서로 경어를 사용한다지만 꽤 문어체적이어서 정말 이렇게 대화를 할까 신기하기도 했는데 서로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옮긴 부분도 다르지 않았다. 수행자처럼 말하고 살아가는 부부 역시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하고 어긋나는 때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는데 후에는 어김없이, 그 사이의 성찰과 진심을 담은 한결 지극한 대화가 오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소하든 무겁든 상처와 자극을 주고받는 일은 피할 수 없고 그를 다루고 나아가는 태도에서 관건은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걸, 당연하지만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날 뜨겁게 사랑했고 자신이 꿈을 좇을 때 가족과 생계를 책임졌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잃지 않으며 은퇴 이후 자신의 시간에 충실한 아내를, 남편의 시각과 입장에서 바라보고 기록한 내용에는 강인하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아내의 면모가 많이 드러난다. 따로 또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빚졌던 남편의 마음과 그러한 과정을 희생이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도 후회도 없는 아내가 행간에 나란히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욕망과 즐겁고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관심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살아가는 아내의 일상은 이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중년의 아내는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며 출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도 했었다는데, 그들의 삶이 운 좋게 보통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피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면 공부와 참선으로 매일 자신을 단련한 오랜 날들이 모여 가능한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가족의 시간'이 시작되는 첫 번째 글은 서울과 파주와 영국에 머무는 가족들이 각기 하늘을 찍어 메신저 대화방에 올린 사진 이야기와 함께 "이 하늘 사진 한 장씩은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도 가족이 떠오르더라는 말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97쪽)로 마무리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체로서의 거리감과 믿음과 애정으로 연결된 안정감을 유지하는 가족의 한 장면으로 다가왔는데, 뒤의 한 에피소드에 따라붙는 "지금 딸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겪을 판단과 선택을 홀로 하는 독립을 훈련 중이고 아내와 나는 간섭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인내를 연습 중입니다."(172쪽) 라는 문장으로 이러한 관계와 삶이 그저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축보다 경험에 교육, 문화생활, 유학, 여행 등 개인의 성장에 충실하자고 약속한 결혼 초의 원칙대로 살아온 가족은 부와 성공이라는 사회의 잣대와는 다른 길을 걸었고, 각자의 충만함과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놓치지 않은 모습이어서 부럽게도 느껴졌다. 저자가 가족들에게 때로 강요하기도 했다는 한 가지는 글쓰기,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스스로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159쪽)이며 "글쓰기의 최종 목표는 내 삶이 좋은 삶이 되도록 하는 것"(160쪽)이라는 말은, 약간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는 멋지고 닮고 싶은 점들이 많이 발견했다. 동네와 이웃들에 관심하고 살피는 모습, 본능처럼 골목 끝까지 눈을 치우는 모습, 사용감 때문에 교체한 모티프원의 수건과 시트를 동네에 가져다 이웃들에 나누는 모습,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을 중고 거래로 마련하고 처분하는 모습, 한 모임의 남미 자전거 여행을 마음 가는 대로 자원하고 장기 휴가를 내고 40년 넘게 타보지 않은 자전거를 장만해 연습하고 여러 준비를 거쳐 해낸 모습 등.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 조금 더 어려운 것은 그 생각을 시작하는 것, 제일 어려운 것이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다."(88쪽), "나는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191쪽), "우리도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어요. 어제도 두부 한 모에 배추 한 포기, 부추 한 단, 오징어 한 마리까지, 이렇게 무절제하게 장을 봐서야 되냐고요."(201쪽), "신념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사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 더불어 화를 내지 않고 사는 것이다."(207쪽), "왜 두렵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두려움은 바라보고 있으면 커지고 직면하면 사라지지요."(250쪽) 라는 말 앞에서도 잠시 멈추어 나를 생각했다. 맥락없이 뚝 떼어놓으니 이상하지만, 금세 잊고 싶지 않아 적어둔다.
작년에 남해의봄날 정기구독으로 받은 책이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묵혀두다가 읽었다. 부부와 아내는 나와 무관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나나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괜히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막상 책을 펼치고서는 쉽게 단정했던 편견이 민망해졌고, 타인의 삶과 이야기에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며 읽었다. 쉽게 변할 리는 없겠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오롯한 혼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삶은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말미의 서지 정보에는 '글과 사진 이안수' 그리고 '고마운 분 강민지'라고 부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저자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인 에필로그(262쪽)는,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게 두어야 합니다. 당신과 나에게 속한 것들, 그리고 당신과 나까지도…."라는 아내의 말을 인용하고 "하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바다'가 됩시다. 당신이 이미 나의 바다였듯이."라고 끝난다. 서로에게 바다가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아름답지만 내 몫이 아니라고, 대신 책 덕분에 알게 된 어떤 삶의 태도를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이안수
2021.11.30초판1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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