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들이 연속된 책이어서 책장을 열기 전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했는데, 이야기들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작가의 말’이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고 이야기들은 다행히 두 챕터로 나뉘어져 묶여 있어서 약간의 변별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첫 번째 파트인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의 작품들은 각기 다양한 소재와 주제와 메시지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접촉 증후군을 앓는 개체들이 깨닫게 된 사랑의 다른 얼굴, 사고 이후 장착하게 된 기계 눈의 양가성,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동일한 존재의 삶, 제한된 감각영역의 매개와 전환의 의미, 이국적 경험의 타겟으로 축소된 소멸 위기의 행성어와 전뇌 통역 모듈 부적응자에게서 존재 의의를 발하는 행성어 책들, 예언이나 전망과 별개로 도래하는 미래의 실체, 발라드의 주기적 유행 속에 공유되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 우주를 넘나드는 최첨단의 장비로도 포착할 수 없는 풍경과 그를 마주하는 여러 가지 방식과 어떤 마음. 납작하게 기록하게 되어 민망하지만, 이야기 자체를 즐기고 여운을 찬찬히 곱씹기에 작가의 상상과 기발한 설정은 여전히 내게 낯설었다. 감각와 사유를 전복하는 대다수 이야기의 기저에 '인간적인 감수성'과 인류의 삶으로부터 은유한 상황들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지구와 현재라는 시공간의 제한을 거두절미하고 넘나드는 배경은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나마 "행성어 서점"과 "포착되지 않는 풍경" 정도에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파트인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에 속한 작품들 중 몇은 [지구 끝의 온실]을 떠올리게 했고, 그의 짧은 외전들처럼 느껴졌다. 균류나 식물처럼 느리고 질기게 멀리 퍼져나가는 것들에 대해 관심하던 아영이 작가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고, “늪지의 소년”의 가설을 원전처럼 인용한 “오염 구역”과 두 작품의 후일담인 “가장자리 너머”는 완전히 유기적인 작품들이어서 짧은 이야기들의 연결로 만들어낸 '김초엽 유니버스'의 일면을 징검다리 건너듯 경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구체적인 배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대체로 기이하고 낯선 감각, 개체성을 넘어선 지각 체계의 연결 혹은 확장, 외계종의 침투와 그에 대한 주류적이거나 비주류적인 반응, 섣불리 유해성을 낙인찍은 이종의 숨겨진 가치와 그들과 공존하는 미래 등 이전 작품들의 주요 요소들이 재등장하거나 업데이트된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가 천착하는 대상들에 대한 몰두, 개체-집단간 선의에 기반한 호혜적 관계와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를 향하는 이야기들의 다양한 변주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얼마 전 단편 모음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읽은 탓인지 어떤 지점에서는 변주를 넘어 복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아마도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없는 과학 지식과 일천한 SF 독서력 덕분에 작가가 창조한 다른 세계의 디테일과 이야기들에 온전히 빠져들거나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낯선 감각과 상상을 통해 그려낸 작품들이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그 속에 다른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때로 망설이고 주저하면서도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것이 도전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그러나 예측했던 대로 내가 어떤 이야기에 매료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으므로, 명망과 마케팅에 현혹되어 굳이 '젊은' 소설가의 책을 구입하는 일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절감했다.
김초엽
2021.11.1초판1쇄 11.5.2쇄 발행,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