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5. 7. 22:16

 

 

멸망으로 폐허가 된 거주구 행성들을 탐색해 정보를 수집하는 '태생적인 회수인' 로몬, 불멸인의 행성 3420ED의 시스템 관리자 셀, 행성이 소멸에 이르자 버려지는 기계혁명을 도운 결함을 가진 복제 라이오니(<최후의 라이오니>).
시지각 이상증으로 폐쇄 공동체에 격리된 채 살아가는 모그들과 그들의 감각의 도구이자 연결망인 플루이드(<마리의 춤>).
몸의 위치와 동작을 감지하는 고유수용 감각의 불일치로 몸 정체성이 분열되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로라>).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후각 수용체를 통한 호흡으로 공기 중 분자가 실어나르는 의미를 읽고 소통하는 지하 세계의 행성과 수백 년 전 출발한 동면 캐빈에서 깨어난 원형 인류(<숨그림자>).
침략자를 받아준 오브와의 오랜 협약을 '신앙의 필요'로 치환해 행성을 유지하는 벨라타, 대기 중 분포하는 신경독성 물질로 인해 마지막 다섯 해의 비극적 망각 폭력 '몰입'을 경험하며 짧은 삶을 마감하는 운명의 벨라타인들(<오래된 협약>).
유기체 뇌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동 지식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생성된 거대 인지 공간의 압도적 권위와 그 그늘 아래 망각되고 사라지는 가치와 기억들(<인지 공간>).
'국지적 시간 거품'을 연구하던 언니의 사고로 완전히 다른 감각과 시간, 지각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매(<캐빈 방정식>).

얼마 전 [지구 끝의 온실]을 읽었지만 SF 면역이 생긴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생경한 이야기들에 대한 내 식의 정리가 필요했다. 각 작품의 구체적인 배경과 사건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지구와 인류와 감각의 ‘표준’을 벗어난 개체가 등장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서사로 전개되지만 구조나 관계,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을 떼어서 보면 지금의 세계에서도 발생하고 존재하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야기가 담지하고 있는 메시지들에 공감이 되는 지점이 많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득하고 애틋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를 현실의 유비나 은유적인 차원의 메시지로 손쉽게 전환해 받아들이는 것은 SF 장르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도 독자도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은 이곳 지구이니 크게 실례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지구의 시공간성을 벗어난 곳에서도 존재하는, 결함이나 결핍을 지녔거나 소수자의 정체성을 보유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드러내고 그 관계를 역전시키면서 당연하게 여겨져온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점을 환기하는 이야기들이라고 느꼈다. 결함 있는 존재들에게 닥치는 난관이나 제한은 지금의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 당사자들은 화자인 주인공이 놓쳤던 것을 깨닫게 만들고 인식과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것이 기계적인 도치나 전복으로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작가의 다정하고 섬세한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일곱 편의 작품은 대부분 멀리까지 나아간 이야기들이지만, 다른 감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를 상상하는 일의 도저함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가득한 괴리와 어긋남을 직시하고 누구든 자기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낯설기만 한 세계의 향연이어서 실은 하나의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약간의 긴장이 동반되었고, 상상도 못한 개체나 행성의 이름이나 환경을 접할 때면 조금은 막막한 심정이 반복되기도 했다. SF 문학에 대한 낯섦이 직접적인 이유일 테지만, 근원에 자리한 스스로의 보수성을 새삼 직면하며 견디듯 읽어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무언가를 읽고 받아들이는 일은 늘 나를 비추는 일이고 특히 그 순간 나 자신의 상태와 긴밀하게 연계된 일이다 보니, 지금 나 하나도 벅찬데 이런 버거운 이야기들을 계속 읽어야 할까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꾸역꾸역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힘들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으로만 쪼그라들고 침잠하며 자신 밖의 존재와 현상에 무관심하고 냉소하게 되는 현실의 축소판을 체현하는 독서 중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멸망을 넘어 연결된 셀과 라이오니, 모그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싶었던 마리, 세 번째 팔을 갈망한 로라와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진, 부당하게 살려진 세계에서 다시 나아간 조안, 침략자들에게 행성의 시간을 나눠주고 오랜 잠에 빠져든 오브, 사적이고 ‘쓸모 없는’ 기억을 소중히 했던 이브, 어긋남을 통해 다른 감각과 차원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매까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해함을 넘어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어차피 외로울 수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작가의 말'을 빌어오자면 "완전히 포개어질 수도 공유될 수도 없는,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을 영원토록 홀로 떠돌지만, ...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그 짧은 접촉의 순간들을 그려내는 일"이 뜨겁게 새겨진 작품들이었다.

 

작품 속 타인의 죽음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과 경쟁과 효율을 내면화한 채 누군가 배제하고 통제하며 지속되는 행성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거울처럼 비춘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함이나 지체를 동반하는 신체 일부의 결함이나 요소적 결핍을 넘어 신경전형주의에 대한 의문,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감각과 인지의 세계를 뒤집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정적이고 차분하게 회고하듯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상상을 통해 무척 도전적이고 전위적인 인식의 전환을 향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낯설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마냥 빠져들기보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던 걸 보면, 자극보다 오랜 취향이 더욱 공고하다는 걸 실감했지만 말이다. [행성어 서점]도 사두었고 곧 읽을 테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당분간 거기까지가 될 것 같다. 과학에 기반한 서정과 아름답고 아득한 세계의 매력이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어느 날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 



김초엽
2021.10.15초판1쇄인쇄 10.20발행, (주)한겨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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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