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23. 00:00
아주 개인적인 기억과 다시 만나게 해 준..

2년 전, 아니 벌써 3년 전이 되었다. 마음이 정처 없었던 어느 해 가을, 홀로 떠난 배낭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파리였다. 따스함과 화려함보다는 그늘진 우울함에 더 끌리는 마음 그대로 나의 여정은 독일을 중심으로 동부 유럽의 몇몇 나라들 위주로 짜여졌었다. 마지막 5일간을 파리에 머물며 베르사유도 별로고 루브르도 내키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기대한 곳은 바로 근교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미술에 특별한 조예도 특출난 감식안도 없는 내가 마음에 담는 그림들은 대체로 고독하고 우울한 인생을 산 화가들이 그려낸 헛헛한 정조를 담은 것들. 그런 의미에서 고흐는 참 제격이다. 그림을 그려본 일도 없고 그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그저 좋아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던 그의 그림은 그 삶 만큼이나 쓸쓸하고 허허로와서 언제나 마음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킨다.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인터넷 이곳 저곳을 뒤져 오베르 쉬르 우아즈, 일명 고흐마을에 대한 각종 정보를 찾아두고 2000년 10월 5일 마침내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평온한 전원의 풍경을 지나친 기차를 내려 고흐의 그림들이 걸려있는 소박한 역사를 빠져나와 내려선 길에는 그림 속 태양을 닮아 꼬불하게 말려있는 가로등과 인적이 드문 흐린 하늘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말년에 고흐가 머물던 여관은 식당과 기념관으로 바뀌었고 백여년 전 목숨을 끊었다는 방에는 그가 숨쉬던 광기어린 고독이 스며든 듯 잔잔하고 섬뜩한 공기가 배어있었다. 고흐의 그림 속 풍경을 따라 가셰박사의 집과 오베 성당, 까마귀 나는 밀밭까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길을 걷다보니 동생 테오와 함께 묻혀있는 작은 묘지에 다다른다. 그의 삶만큼이나 초라하고 쓸쓸하게 붙박혀있는 비석에서 잠시 마음이 아련해지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그 날의 기억은 이 책과 함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어찌 보면 발랄하고 상큼한 제목. 단지 '고흐'여서 선택했던 이 책은 그만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샤갈, 마티스, 피카소, 르누아르를 비롯한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과 중요한 미술관들을 일별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 안내서와 교양서의 면모를 두루갖춘 작은 판형의 부담없는 내용으로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갔고 고흐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가진 내게 고마운 환기를 불러일으켰다. 말미에 사진과 함께 덧붙인 미술관 안내는 프랑스 미술에 관심이 있고, 여행을 떠날 사람이라면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 이 작은 책을 배낭에 넣고 또다시 그 곳으로 떠나고픈 바램으로 나는 가끔 이 책을 열어본다.



고흐의집을아시나요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 청소년예술
지은이 최내경 (오늘의책,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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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