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24. 20:00
체는 없다. 그저 쿠바가 궁금하다면...

한 때 불어닥쳤던 게바라의 열풍은 이제 잠잠해졌다. 팬시가 되어버린 혁명가의 포스터는 뭇 영화 포스터나 가수들의 브로마이드와 변별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저 궁금한 사람은 언젠가 다시 찾아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음에 새길 것이고 아니면 그만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던 시절, 교육 방송에서 봤던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있는 한 사람에 대한 흑백의 기억이 시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97년을 전후해서는 조용히 그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사망 30주년을 기념하는, 다소 함량 미달이었던 그의 일기와 삶을 재구성한 소설 등이 출판되었다. 조악한 편집과 떨어지는 밀도, 시의성에 편승한 기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단편적인 정보와 인터넷 말고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 길이 없었기에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2000년, 인물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마치 이것이 진짜라고 말하듯 당당한 양장본으로 돌아온 '체 게바라'는 그 신드롬의 정점에 불을 붙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실천문학사의 양장본 평전 출간으로 신드롬이 일어난 후 나온 몇 권의 '체 게바라' 관련 책들과도 많이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저 먼 나라에서 이미 살다간 인물에 대한 나의 매혹이나 진심과 별개로 그는 이미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를 읽고 새기면서 무언가 다르고 싶은 욕구나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 한 권이라도 붙잡고 확인하고픈 나의 마음 역시 그리 별다른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책의 내용에 대해 말을 하자면 '체 게바라의 나라'를 뺀 '쿠바를 가다'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남미 그리고 쿠바는 매혹적인 자연과 신비로운 문명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선망의 땅인 동시에 물리적 거리 만큼이나 아직은 아득한 심리적 거리감에 둘러싸인 곳이기도 하다. 이 미지의 땅에서 선구적(?) 상공인의 길을 걷고 있는 저자는, 조금씩 환기되는 남미와 쿠바를 향한 관심에 대해 경험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안내와 정보를 제공한다. 게릴라 혁명에 성공한 이상적인 국가 모델이었던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압도적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활기찬 공산주의 국가 쿠바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열 번 이상 방문했던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쿠바의 이모저모를 따스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소개한다. 

호감이건 반감이건 나처럼 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집어든다면 일종의 배신감 내지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게 될 지 모르겠다. 제목과의 연계성을 의식해서인지 쿠바 곳곳에 산재한 체 게바라의 기념물이나 혁명 정부에서 활동할 당시의 흔적들을 일별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쿠바와의 무역을 업으로 삼는 사업가의 쿠바 안내에 머무른다. 게다가 전내용에 걸쳐 깔려있는 저자의 과시 욕구와 전시성 일화들은 책의 흐름을 끊어놓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성격은 앞 뒤 표지가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데, 앞표지에는 너무나 익숙한 체의 사진이 뒷표지에는 저자의 활동을 자랑하는 사진과 설명이 채우고 있다. 얻을 것이 없는 책은 아니지만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감지할 수 밖에 없는 조금 씁쓸한 독서였다.



체게바라의나라쿠바를가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 해외여행 > 북남미여행
지은이 강태오 (마루(김억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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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