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12. 25. 19:05



의미 부여한 지 오래인 크리스마스, 대략 또래들인 책 모임 성원들도 그러한 덕에 12월의 모임 장소는 통영이 됐다. 서울, 안산, 의왕에 사는 세 사람이 집으로부터 왕복 10시간 쯤의 거리를 이동해 1박 2일 모임에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고, 마침 내가 책을 추천할 차례여서 통영과 관련 있는 세 권을 후보로 정했는데 투표 결과 전영근 화가의 [그림으로 나눈 대화]로 결정되었다.

 

단체 활동하며 ‘자료’가 아닌 책은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어렵다며 의왕 사는 K가 지인들에게 제안한 책 모임의 첫 번째는 2020년 8월이었다. 활동 그만둔 지 두 달째를 보내며 다음 달엔 집 구하기 겸 한달살기를 예정하고 있었던 내 사정으로 9월에 [백석 평전]을 읽고 1박 2일 모임을 한 이후, 이번이 통영에서의 두 번째 모임이었다. 그때 함께했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불참, 이후 모임에 새로 합류한 L은 장거리 버스 이동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편임에도 큰맘 먹고 함께했다.

 

이주한 후에 두 번은 명절 전으로 모임을 잡아 하루이틀 K의 집에서 신세지며 모임을 했었는데, 이래저래 번거로운 일이라 지난해 가을 이후 나는 온라인으로만 참여했다. 성원은 일곱이지만 보통 너댓이 함께했고 다들 바쁜 단체 활동가들이라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넘쳐나는 백수이자 혼자만 온라인으로 참여할 때가 많은 나는 사실 점점 심드렁해지는 참이었는데, 오랜만의 '청객'들을 기다리며 마음이 살짝 들뜨기도 했다.

 

해가 짧은 겨울 여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모두가 터미널에 도착한 4시쯤 바로 이순신 공원으로 향했다. 지난 통영 모임에서 동피랑을 구경하고 갔더니 이미 어둠이 내려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바다와 닿은 공원 곳곳을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통제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구안을 걸어 저녁 식사를 하러 들어간 곳은, 처음 가본 나름 유명한 해물 식당. 생해물을 먹지 않는 한 사람을 고려해 굴 정식 3인분과 굴전을 시켰는데 가격을 고려하면 많이 부실한 느낌이 들었지만, 언젠가 중앙시장 내의 식당에서 회정식을 먹었을 때처럼 많은 음식이 남는 곤란은 없어 다행이었다.

 

중앙시장에서 안주로 먹을 회를 조금 사서 집 도착, 어엿한 책 모임이지만 이번에는 장거리 이동의 1박 2일 여행이 좀 더 우위를 점한 관계로 책 이야기보다는 다양한 주제의 수다로 시간이 흘렀다. 기분이나 내려고 사둔 작은 치즈케이크에 얼마 전 사촌의 슈톨렌에 동봉되었던 트리초를 꽂으니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고, 초를 불며 마음속 바람을 떠올리면서 성탄을 맞은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경솔한 결정으로 조용히 다사다난했던 올해의 일들을 떠올리며, 새해에는 조금 다른 일상을 보낼 수 있길 바랐다.

 

베이글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봉평동으로 향했다. 통영까지 와서도 급한 문서 작업을 해야 하는 한 사람을 공간에 남겨두고, 전혁림 미술관을 둘러 보고 동네를 산책하며 올해 새로 그려진 벽화들을 구경했다. 며칠 전 알게 된 RCE세자트라숲에서의 전영근 화가 초대전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 갔는데, 아무도 없는 전시공간을 작가가 지키고 계셨다. 책을 읽고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반가워 하시더니 그림을 둘러보는 우리에게 와서 한 점씩 작품 설명을 해주셨다. 덕분에 '에스키스'가 그림의 밑그림 단계를 이르는 말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 추상 작품에 담긴 의미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집과 차에 책을 두고 간 탓에 도록에 사인을 받았는데, 예기치 않은 만남이 유쾌했고 멀리까지 온 이들과의 책 모임이 잘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공간으로 돌아가 특근하던 이를 태우고 내가 경험한 통영 최고의 맛집, 통통칼국수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버스에서 불편할까 싶어 칼국수 대신 경아김밥을 선택한 두 사람을 포함해 모두가 만족한 식사였고, 김밥을 하나 더 추가해 남김없이 먹고 나왔다. 터미널 근처 해안가에 자리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4시 남짓 떠나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최대한 늦게 떠나겠다며 6시대 티켓을 끊은 한 사람과 남아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일하던 단체에서 활동하는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에 지난 시간이 떠오르며 공감이 되었고, '그저 책 모임'이라고 생각했던 관계의 선이 약간 흐릿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배웅하고 헤어졌다.

 

고작 1박 2일이었는데도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피곤한 것이어서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아프고 방전 상태가 되었지만, 좀처럼 여행하지 않는 L의 좋은 추억 하나 더 쌓고 올해를 마무리하게 되어 고맙다는 메시지는 반가웠다. 안부 연락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으로서 대다수의 지인들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혼자만의 생활에 더 익숙해지고 은연중 모두와의 마음의 거리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가끔의 만남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정적인 일상의 조화를 새삼 느끼는 1박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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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