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10. 9. 00:15



광주시립교향악단과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공연, 전날 당도한 교통 혼잡 우려며 실황 음반 녹음 안내 문자로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통영국제음악당에 여러 번 갔었지만 거리두기 좌석제가 해제된 공연은 처음인데 원래 내 차로 갈 계획이었다가 주차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관뒀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G가 도착하자마자 차를 타고 바로 출발했지만 공연이 30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라 음악당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진입이 불가했다. 안내에 따라 주변 공터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몇 바퀴 돌다가 겨우 주차하고 음악당 로비에 들어섰다. 거리두기를 시행할 때도 통영에 살면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본 곳이 음악당이었는데 그때보다 배는 많은 인원에, 90초 매진이었다는 공연 예매에 성공하고 2달 넘게 기다린 사람들이 뿜어내는 고양된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의 자리는 처음 경험하는 2층 베란다석, 급한 중에도 나름 무대와의 각도를 생각해 선택한 좌석이었는데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정면의 모습이 보이는 괜찮은 시야였다. 클래식 문외한이지만 유튜브 영상으로도 빠져들었던 연주를 곧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상기되었다. 합창석까지 오픈해 관객으로 꽉찬 공연장은 시작 전에도 조용했는데, 그럼에도 객석을 채운 이들의 기대감과 긴장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화해 공간에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사면에 빼곡한 관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피아니스트의 부담이 지레 걱정되기도 하고, 무대 끝으로 엄청 붙여 세팅된 피아노를 보면서 중간 블록 앞 좌석에서 숨죽이며 연주를 지켜볼 누군가들이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다.

 

5시가 다가오고 실황 음반 녹음에 대한 삼엄한 안내에 실내 분위기는 더욱 고요해졌는데, 교향악단원들의 입장에 이어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엄청난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나왔다. 1부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 b장조 Op. 73 '황제', 전날 몇 번 듣기도 했고 익숙한 주제구 덕분에 금세 집중이 됐다. 지휘자의 손짓과 몸짓에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악기들의 활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황홀경에 빠진듯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연주를 멈추고 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가볍게 몸을 움직이거나 지휘자를 주시하며 연주 준비를 하는 피아니스트를 보고 연주를 들으며, 눈과 귀만 있는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클래식 음악에 주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따안 따라라라라 딴딴딴딴" 하는 부분이 나올 때면 절로 감흥이 환기되었고, 짧지 않은 연주가 끝나고 터져나온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객석과 무대의 분위기는 한껏 뜨거워졌다. 기립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많았고, 지휘자와 단원들과 인사하며 미소를 보이고 호흡을 가다듬은 피아니스트의 커튼콜은 세 번이나 거듭되었다.

 

연주를 하는 이들도 듣고 보는 이들도 엄청 고무됐던 1부가 지나고 인터미션, 긴장과 몰입으로 잔뜩 열기가 오른 공연장을 잠시 나와서야 나는 2부 프로그램에는 피아노 연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1부가 끝났는데 커튼콜 연주를 세 번이나 해준 피아니스트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준비랍시고 전날 오늘의 프로그램을 리스트로 몇 번이나 들어놓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스스로가 놀라워졌다. 그런 수준에 무딘 귀를 가진 내게도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감동이었고, 수많은 관객들을 사방에 두고도 피아노와 둘만 있는 것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듯 연주하다 금세 교향악단의 연주에 동화되곤 하는 모습 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1부의 연주를 몰입해 듣고 보면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나만 받은 건 아니었을 것 같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느끼는 것은 다를 테지만 나처럼 잘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감동과 흡인력을 발휘하는 연주와 존재 자체가 그를 게임 체인저로 만든 것이겠거니 싶었다. 

 

2부에서는 무대 중앙의 피아노가 빠졌고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와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내게는 그저 잔잔한 느낌이어서 전날 몇 번 들었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광주여 영원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을 때와 달리 엄청나게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윤이상이 1981년에 작곡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외신을 통해 현장의 참상이 생생히 전달되었을 테고 해외에서 고국의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느꼈을 비통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곡에 담긴 느낌이었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몇 번 윤이상의 작품 연주를 들었지만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었는데, 영상이나 책으로나마 알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이어서도 그렇겠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연주가 끝나자 객석의 환호가 정말 뜨거웠다.

 

1부가 끝나고 터져나온 감격적인 환호가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피아노 천재를 향한 열광이었다면 2부가 끝난 후의 반응은 지휘자와 교향악단이 한 호흡으로 선사한 연주와 작품에 대한 감동적인 찬사였던 것 같다. 객석의 뜨거운 열기에 화답하듯 커튼콜을 거듭하던 지휘자 홍석원은 빨간 표지의 "광주여 영원히" 악보를 들어 가슴에 대고 인삿말을 전했다. 아둔하게도 그제서야 '광주'시립교향악단의 "'광주'여 영원히" 연주가 갖는 남다른 의미가 새삼 다가왔고, 어지간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클래식 무대에서 말로 전하는 인사가 암묵적인 권위의 약속을 깨뜨리는 진심의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교향악단의 공연을 본 건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이나 폐막 공연 서너 번뿐이지만, 그때마다 공연이 끝나면 벅찬 마음이 가득히 차오르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가사가 있는 노래를 통해 위로를 많이 받아왔는데, 다른 결의 음악의 힘이 클래식에는 있는 듯하고 좀 더 알게 된다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무대를 선사해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다. 반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출연한 대담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면서, 우아하고 정갈한 클래식 음악가들의 세상이 다른 시공간처럼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어떤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 기예는 전제일 뿐 영혼과 정신의 일이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삶과 연주이기 때문에 분석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 마음을 연 누구에게나 깊은 감동이 전해질 수 있는 것 같고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음악의 힘, 예술의 힘일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비슷한 마음이었을 G와 함께 공연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G의 차를 두고 내 차를 몰고 닭갈비를 먹으러 무전동으로, 유튜브에 20분 내외의 클립으로 올라오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열심히 보다가 얼마 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기하게 잊히지 않았다. 먹방에 관심 없고 tv에서 누가 뭘 먹는다고 덩달아 먹고 싶어지는 일이 거의 없는데, 먹는 일에 집요한 세태를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영향을 받는 건지 요즘 낙이 없어서인지 희한하게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나오는 음식은 가끔 먹고 싶어진다. 하여 검색까지 해서 프랜차이즈 닭갈비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고, 뭔가를 먹으며 엄청나게 맛있다고 느끼는 일이 거의 없는 평소의 경험대로 역시나 그냥 그랬다. 그 식당이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고 나의 둔감한 미각 덕분일 테다.

 

밤의 무전동은 처음이었는데 주말이고 술집과 식당이 밀집한 골목이어선지 거리에 사람들이 꽤 있었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대도시 먹자골목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통영에서 어둠 속의 활기를 목격하는 건 이상하게 반가운 일이었다. 공연의 감흥과 거리의 활력, 좋은 동행자 덕분에 살짝 들뜬 상태에서 동전노래방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G도 좋다고 해서 통영에서 처음 노래방에도 갔다. 천 원에 세 곡, 둘이 가진 현금을 탈탈 털었고 리모콘 조작 실수로 G가 1곡을 날린 덕에 20곡의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어렸을 때 노래방 참 좋아했는데 십수 년 멀리하다 어쩌다 보니 코로나19 시국에 일년에 한 번씩 가게 된다. 재작년엔 이사 직전 우리집에서 책 모임을 하고 오목교에 있는 동전노래방, 작년엔 책 모임 겸 신세진 지인이 사는 의왕역 근처 노래방, 올해는 바로 오늘. 갈고닦지 않으니 노래 실력은 마음에 차지 않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도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노래들을 확인하는 반가움은 컸다. 

 

잔잔하게 살다가 꽉찬 객석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밀도의 호응에 몰입도가 엄청 높았던 무대에 집중하고 꿈처럼 들뜬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노래방까지, 드물게 감상과 실연을 겸비한 그야말로 음악의 날이었다. 초심자로서 새롭게 접하는 클래식이 주는 신선한 감동도 어렸을 적부터 나를 키운 팔할이었던 가사 있는 노래들의 공감과 위로도 새삼 참 고맙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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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