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29






다짐도 다이어리도 없이 맞은 새해, 이제는 좀 무연해지고 싶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닌 척 꽤 기념주의자인 내가 온전히 그럴 리 없어 어제 집에 다녀오는 길 영화를 봤다, '굿모닝, 나잇'. 1978년 로마에서 실제로 있었던 지하혁명조직 붉은여단의, 우파와의 연정을 구성한 기독민주당수 알도 모로 납치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 베르톨루치와 비견되는 고집스런 좌파 감독이라는 마르코 벨로키오의 이름도 처음 접했고 삼십 년 전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다는 사건 역시 모르는 바 였지만, '잔혹하고 비참한 비극의 결말에서 무엇인가 발견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전언에 혹해버렸다. 새해 벽두에 보기엔 꽤 심란한 영화겠다 싶었지만, 일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나름 의지 어린 선택이기도 했다.
 

붉은여단의 당수 납치 살해 사건의 전말이라는 간략한 줄거리에 실린 영화는, 스크린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도의 긴장이 객석에 앉은 나까지 이따금 바튼 한숨을 몰아쉬게 만들만큼 농밀한 공기를 담고 있었다. 각자의 신념으로 감금하고 감금당한 자들의 갈등과 고뇌 그리고 암중모색의 과정이,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몽환과 상상으로 버무려져 내내 가위에 눌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터질 듯한 밀실의 고립을 극대화하는 풍경들과 대비되는, 윤리를 무화하는 전도된 살풍경 속의 대의와 당위, 그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주인공 키아라의 시선과 감정이입. 두근거리는 심장을 찢을 듯 초현실적으로 폭발하는 음악들. 심호흡이 필요한 영화였다.
 

신혼부부를 가장해 빈 아파트를 보러 간 조직원들에게 방백처럼 그러나 사무적으로 집안 곳곳을 설명하는 중개인의 목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집중적이지만 형식적으로 계약의 성사여부에 사활을 건 중개인의 관심과 아지트로써의 효용을 남 몰래 가늠하는 두 주인공의 예리하고 긴장된 시선, 딱 그 거리만큼 영화는 공고하고 복합적으로 세계를 나눈다. 미궁의 큐브와도 같은 아파트에 갇혀 이념의 호흡을 고르는 붉은여단의 사인방, 그들은 목숨과도 같은 혁명의 대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을 수행하고 성공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무시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윗층의 이웃, 여유로이 베란다 밖을 바라보는 정원 너머의 이웃,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일터의 동료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에 모인 일가친척 사이에서도 키아라는 불안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강박적인 경계의 촉수를 곤두세울 뿐이다. 심지어 알도 모로를 가둔 가벽 책장 뒤의 감금실보다 그들이 활보하며 생활을 가장하는 너른 거실의 공기가 더욱 팽팽히 당겨져 폭발 직전의 고압을 머금고 있다. '당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어요' 유유히 담배를 물고 베란다 너머 관음의 시선을 보내던 이웃의 비밀스런 발설은, 허탈하리만큼 섬뜩하게 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세상을 증명한다. 
 

실제와 환상을 마디없이 오가는 영화는 결국 아무 것도 웅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결말은 담담히 자막으로 정리되고,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는 객석 위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골치가 아파왔다. 휴머니즘에 안주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혁명의 대의와 현실의 정체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단 목숨을 둘러싼 운명적 결정처럼 극적인 순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극좌 모험주의의 반면교사라는 깨달음은 어쩌면 후대에나 가능한 것, 그들 모두가 '고결한' 이념의 제물이자 제사장으로 역사의 격동에 휘말리고 만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때로 현실보다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것이어서, 새벽 안개 사이를 유영하듯 걸어가는 알도 모로의 뒷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새해 벽두용으로는 역시 무거웠다. 다짐 없는 다짐의 텍스트로 삼기에 영화는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고, 삼십 년 전 그들의 세계와 지금의 나를 감히 하나의 맥락으로 생각할 근거도 없다. 감독이 발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도 모로의 납치 과정에서 다섯 명이 죽었고 아직 그의 유족들은 지옥같은 죽음의 기억을 생생히 새기고 있을 것이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지만 다시 헤집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끔은 차원을 달리 하는 갖은 것들이 '나'에게로 와 하나의 상징으로 포개지기도 하는 법. 집을 나서기 전 읽은, 아침부터 심사를 복잡하게 만든 한 통의 메일이 떠올랐다. 기억에서 지운 지 3년하고도 8개월, '부디 읽어주기를 바래'라는 제목을 한참 바라봤었다. 2년이 넘도록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다는 그의 편지는, 고해성사하듯 진심의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오랜 자학의 흔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긴 독백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었지만, '잘 살아' 제목을 붙여 짧은 답장을 보냈다. 담담하고 냉정하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이제야 끊어냈다,고 생각했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이었던,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나는 '거대한' 무엇 아래 묻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잘 살아, 내게 쓰는 편지에도 달아주고 싶은 제목이다.




2007-01-03 00:44,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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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