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만에 집에 왔다. 일곱 편의 영화를 보고, 한 달 건너뛴 책 없는 책 모임을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숙제였던 통영행에 대해 엄빠에게 말씀드렸다. 수년 전부터 너무 늦기 전에 서울을 뜨겠다고, 통영에 가서 살고 싶다고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통영은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지역이 됐고, 언젠가는 정말 화를 냈다. 나름 충격 완화를 위한 거였는데 반응이 좋지 않아 이후에는 엄마 앞에서 입에 올리지 않았다.
2018년 여름, 교통사고를 당하고 결심이 굳어졌다. 차량이 우회전하는 길목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널 만한 차간 거리가 생겨 나름 건넌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가장 앞에 있던 코란도가 와서 옆구리를 치었다. 빤짝- 잠시 정신을 잃었고 조금 붕 떴다가 떨어졌다. 코란도 뒤에 있던 차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나를 챙겨줬다. 코란도 운전자는 전방주시를 제대로 안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고, 그나마 우회전하는 길목이어서 속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코란도에 실려 도착한 응급실에서 처치를 하고 반깁스한 다리를 절며 집에 오는 길에야 옷이 찢어졌다는 걸 알았다. 기절하듯 소파베드에서 잠들었다가 다음 날 눈을 떠서 물리적으로 일어나기까지 10분은 걸린 것 같다. 목이 움직이지 않고 온몸이 쑤시고 양다리며 옆구리가 잔뜩 붓고 보라색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들에도 쓸린 상처들이 있었다. 혼자 지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전날 들른 병원에 갔다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금요일 오후라 급한 마음에 집에서 가까운 한방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이 정도는 큰 사고라며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침상이 없었다. 원무과에 예약을 해두고 병원 앞 도로에서 휴대폰으로 교통사고 입원 가능 병원을 검색하고 전화하고를 반복했으나 실패, 응급실에서 한방병원으로 이동하는 택시기사가 얘기해준 병원에 전화했더니 거기도 침상이 없다며 원무과에서 다른 병원을 소개해줬다. 대충 짐을 싸서 도착한 병원은 음... 암튼, 사흘을 거기에서 보내고 자리가 났다는 한방병원으로 옮겨 열흘간 입원을 했다. 퇴원할 때 의사는, 골절은 아니어서 더 입원할 수는 없지만 먼저 정형외과에 꼭 가보라고 했다. 정형외과 의사는 오른쪽 무릎에 혈종이 많고 감염 우려가 있다며 마취도 없이 생살을 째서 짜냈고, 순전히 아파서 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걸 왜 구구절절 쓰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새삼 운전자에 대한 분노!), 암튼 그 사고 이후 사람 언제 어떻게 갈지 모른다는 평소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코란도 운전자가 정신 못차리고 속도까지 냈다면 난 그때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설 전날 밤, 지난주 어쩌다 보니 나의 실업을 먼저 알게 된 엄마가 자초지종을 물었고 결심한 대로 통영으로 이사했다고 먼저 말하게 됐다. 엄마는 경악했고 본의 아니게 지옥을 선사했다. 그냥 이사를 한 것일 뿐이라고, 통영에서 꼭 살아보고 싶었다고, 미리 말하면 걱정과 싸움이 계속될 것 같아 그랬다고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얘기했지만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소 설이나 추석 전날 함께 잘 때 엄마는 11시도 안 되어 곯아떨어졌는데, 그날은 나도 엄마도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에 아빠에게 말씀드렸는데 의외로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주셨다. 덕분에 엄마도 조금은 진정이 됐지만 일요일까지도 눈물 섞인 전화를 받아야 했다.
어쨌든 이제 거짓말은 끝났고, 홀가분하고 후련하다. 너무나 속상해하고 자꾸만 우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불편하지만,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수는 없으니 그런 불편함과 미안함은 감내할 몫. 안산 지인집에서 월요일에 통영으로 돌아왔다. 터미널 가는 길 통화한 엄마는, 아빠가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말라고 했다며 애써 평소의 목소리로 이런저런 당부를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자식인 것 같기도 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