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계정은 있지만 글을 올리지 않은 지는 몇 년이 됐고, 마지막으로 접속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에 없다. 하던 일 그만두고 외딴 곳에 혼자 있으며 외롭지만 그 혼잡한 연결망에 다시 연루되고 싶지는 않아 염두에 없는데, 언젠가부터 일주일에 몇 번씩 누가 어떤 글을 올렸다거나 누구누구가 보낸 걸 포함해 몇십 개의 메시지가 있다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을 친구로 추천하거나 하는 메일은 오고 있다. 대충 보고 삭제하는데 얼마 전에는 마음의 지인 중 하나가 단체의 대표직을 내려놓는다는 글을 올렸다는 메일이 왔다.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삭제했지만, 이따금 그가 떠올랐고 저녁에 전화를 걸었다.
공동의 지인을 통해 나의 거취를 알고 있던 그는 안부를 주고받은 후 여수참사 14주기 준비하자고 전화한 줄 알았다고 농담처럼 말했고, 그날이 다가온다는 것조차 까먹고 있던 나는 진심 놀랐다. 2월 5일, 6일 후면 그날이다. 정말 깜짝 놀란 게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는지 그는 그걸 까먹냐며 웃었다. 2007년 2월부터 4월 초까지, 우리는 함께 여수에 있었다. 이주단체에서 일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때였다. 열 명의 외국인이 화재가 난 보호소에서 나오지 못해 죽고 십수 명이 다친 상태로 다른 보호소로 이감되었던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사건 자체도 그랬지만 주로는 중국,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한 명 포함된 가난하고 힘없는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당국의 처사, 조사 과정, 한국 사회의 태도도 충격이었다. 꾸려진 공대위에 함께하며 겪은 많은 일들 역시 부채감과 자괴감을 안기는 것이었다. 이후 몇 번은 그날이 되면 여수로 내려갔지만 계속되지 못한 채 마음의 짐으로만 남았고, 10주기가 되는 해에는 이따금 고개를 드는 죄책감에 안녕을 고하는 심정으로 여수에 갔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여러 현장을 찾아 다녔고 어렵사리 주먹 쥔 팔을 들어 구호를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누구의 삶이든 하나의 투쟁이고 어떤 존재든 하나의 우주이지만, 싸움의 자리는 좀은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대추리며 강정마을, 희망버스와 즈음의 여러 투쟁사업장에 다시 시선을 두고 기꺼이 찾아가 함께하며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 별 망설임 없이 새로운 단체로 이직했다. '소울 불꽃 테스트' 결과와 달리 전혀 신념형 인간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일찌기 알고 있었다. 감상적이고 허황하게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고, 마음을 건드리는 많은 것들을 알아보고 앓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사람보다는 변하지 않는 노래와 영화, 책을 좋아했고, 사람이라면 고인을 좋아했다. 나는 주로 그렇게 살아왔지만, 불편함과 양심과 연민으로부터도 아주 자유롭지는 못한 성정이었다. 정말 불편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싸우고 있고 때로 죽어가는데 모른 체하고 있다는 것이.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고 한걸음 다가가면 금세 한걸음을 더 들여놓게 되었다. 온전히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좀 편해졌다.
새로운 단체에서의 7년은,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너무 깊이 나아갔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달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온마음으로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고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이 많이 달라 혼란스러웠다. 때로 상처받았지만 홀로 삭이며 냉담해졌고 때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장벽을 높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집단 안에서 온전히 수긍할 수 없는 일에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때가 있었고 대의와 바른 방향이라는 명분으로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 내적 갈등 속에서 낯 모르는 누군가들에게 싸움을 알리고 함께하기를 호소해야 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주위에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듯 보이는 활동가들이 있었지만, 부럽지 않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미에 짓눌리기보다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게 내가 원하는 거라는 걸 인정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다른 세계로 건너온 지금도,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의 소식은 들려온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이 마냥 냉담한 것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음으로만 응원한다는 것을 신뢰할 수 없어 외면한다.
양심과 연민의 발로였지만 절박하게 싸우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 저렇게 고통받고 있다면 그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정쩡한 중간계급으로 쭉 살아온 터라, 체험하지 못한 계급모순이나 체득하지 못한 계급성 같은 것이 컴플렉스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주입되는 신념이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건 대학시절에 이미 경험했다. 대의를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민폐를 끼치는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그런 반복이 나의 소시민적인 개인주의에 힘을 실어주었다. 내 앞가림이 중요하고, 나의 일상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것이 이제는 별로 망설여지지 않는다. 지치기 전까지 지난 10년쯤의 내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다른 세계'에 두 발을 담그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마음의 지인 중 몇이 그런 현장에 있고 나는 그들을 걱정하고 응원하지만, 더 이상 모든 싸움에 대한 응원은 아니게 되었다. 그와의 통화 후에 마음이 좀 어지러워져서 구구절절. 그래도 설에는 가능한 많은 이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책일기2021. 2. 5. 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