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미리 말해두자면, '한낱' 묘사의 힘에 나는 쉽게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는 독자다. 습성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서, 국민학교 시절 애독서였던 '5학년 3반의 청개구리들'의 주인공 고푸름군과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로부터 중학교 시절 '지와 사랑'의 나르찌스니 '수레바퀴 밑에서'의 헤르만 하이르너 등을 거쳐 이후 수도 없는 가상 인물에 이르는 열광이 있었다. 단지 소설속 주인공에도 이런 판이니, 위인전 혹은 평전에 이르면 그 열광은 자못 존경과 사모의 마음으로 심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나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사랑했고, 단지 인명사전에서 본 얼굴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넬슨 제독과 바이런을 흠모했으며, 이후 내가 읽은 평전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을... 그렇다, 살짝 변태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일단 잘 생기고, 게다가 정의롭거나 충절스러우면 환장을 했다. 사춘기를 지나며 발현된 반골기질은 빨강에 가산점을 부여하기 시작했고, 유난히 평전류의 기록을 좋아하는 나의 열광은 지금도 딱 그 수준이다.
리뷰에 앞서 너무 방어적인 장광설을 달아 민망하기는 하지만... 제목 못지않게 '한국의 마타하리, 여간첩 김수임'이라는 부제 역시 민망하다. '경성 트로이카'를 읽고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이 책, 이강국과 김수임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접했던 기억이 있지만 본격적인 기록이 있는 줄은 뒤늦게 알았다. 드라마로 방송중인 '서울1945'의 모티브가 된 책이라고 리뷰에서 읽었는데, 드라마는 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살았던 혁명가들의 이야기는 사실 어떤 것이건 흥미롭다. 특히나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은, 동시대의 풍경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문학계의 분위기를 다룬 글들과 판이한 충동질과 안타까움 심지어 현재적 반성까지 선사해 준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박멸과 북한의 왜곡(?)으로 보존되지 못한 좌파 운동의 기록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주제 넘게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강국과 김수임의 이야기 역시 그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명소설의 형식을 취해 쓰여진 이 기록은, 김수임의 삶을 증언할 마지막 인물로 지목된 저자 개인의 해석과 상상력에 힘 입은 것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으며 수임언니와 나는 신앙인일 뿐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쪽도 저쪽도 한민족일 뿐, 정치와 이를 다스리는 법에는 문외한들이었다는 고백에서도 이 책의 서술이 곧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말미에 덧붙여진 임헌영의 해설 역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강국과 김수임에 대한 기존의 기록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김수임의 동거남 베어드 사령관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정리한 글이라는 점 등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소설가 김주영의 해설이 기록의 무게감을 더하고는 있지만, 실록으로 보기에는 사실 관계의 해명에 난점이 있고 소설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통속적이고 고답적인 평이함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밤새 책을 읽고 리뷰까지 쓰게 만든 힘은, 결정적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지만 실존했던 두 인물(솔직히 말하면 이강국)의 매력과 오늘을 있게 한 해방공간 분단정국의 분위기에 대한 동요 그리고 미완의 기록을 통해 더해진 궁금증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 빈농의 딸로 태어나 11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과 종교의 힘, 타고난 재색과 지성으로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여성 김수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 학부에서 수학하며 원산의 노동자 파업에 관여하다 투옥되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 대학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활동, 수배, 투옥을 반복했던 공산주의자 이강국. 당시 권력자들의 사교장이었던 반도호텔에서 일하며 미군정 하 최고 실력자 중 하나였던 베어드 중장과의 동거로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김수임과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며 자청한 고난의 길을 마다않았던 철저한 혁명가 이강국의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최후는 가슴이 서늘하도록 감동적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저자 역시 동세대로서 경험했을 당시 상황과 풍속에 대한 서술과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나쁘지 않다. 한편 저자가 알고 있는 한에서의 '인간 김수임'을 그리겠다는 의도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의 혼란한 상황과 당시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고투했던 세력의 도덕성 같은 것이 행간으로 전해져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또 김수임과 절친한 관계에 있었던 모윤숙의 행적에 대한 서술과 후반부에 삽입된 모윤숙의 일기에서 발췌한 '옥중기'는, 타협적인 현실주의자의 자기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꽤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대한민국의 수립 자체가 정통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는 확인은 이 책에서도 비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남과 북에서 모두 용도 폐기되어 버린 듯한 인물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사료에 근거한 진실을 알 수 없는 갑갑함이다. 이 책 역시 저자의 용기와 노력과는 별개로, 총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선적 시선의 접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현재적으로 유일한 책이라는 점 그리고 미미하나마 가려진 역사의 부분을 파고드는 기록들이 하나둘 세상에 나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젠가 내막이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검색을 해보니 '이강국 연구'라는 책이 근자에 나왔는데 학문적 접근의 결과물인 듯 해서, 내가 열광하는 인물 묘사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반갑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혹시 우리나라 터가 안 좋은 걸까 낙심하다가도, 수십 년 전 목숨을 바치고 사랑을 던지며 혁명(!)에 투신했던 눈물 겹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 접하다보면 감동으로 마음이 환해진다.
2006-10-08 07:06,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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