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마지막 기록이자 최후의 작품이 된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86년 가을 대구교도소,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바뀌어 감옥 생활 4년을 넘기던 무렵, 기다림이 주는 힘겨움의 한 고비를 맞아 한참 헐떡이고 있을 때였다. 극한 상황에서도 어떤 수사나 허세를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자기 절제,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함, 고통의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는 집중된 정신. 내가 감히 그를 흉내 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을 기다리며 쓴 글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용기와 위로를 주곤 했다. 특히 나는 그의 책에 적힌 마지막 구절을 좋아했다. "진실한 생활에는 관객이 없다. 종막이 오른다.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 깨어 있어 주기를!' 그후로도 나는 오래도록 이 책을 기억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푸치크의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도 꿈에 머물러 있다. - <당대비평> 7호, '우리, 대한민국의 야만을 잊었는가'에서 발췌
문부식님의 '서승의 옥중 19년' 주제 서평에 실린 글의 일부를 좀 길지만 굳이 옮겼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내가 독후감을 적는다한들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만큼 절절하게 이 글을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꽃들'의 시인으로 마음에 담고 있었던 문부식님. 내가 가지고 있는 빛 바랜 시집의 표지 안쪽에는 '93.10.24 책방정신세계' 라고 메모가 적혀있다. 당시 나는 부미방도 광주도 잘 모르던 철 없는 재수생이었고 아마 그날도 학원을 땡땡이치고 대학로에 가서 공연을 보기 전 책방에 들렀을 것이다. 당시의 정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임준철의 노래로 익숙했던 '꽃들'이 반가웠고 또 부끄럽게도 책날개 안쪽에 나온 사진 속의 시인이 너무 잘 생겨서 책을 골라들었던 기억 만큼은 생생하다. 시인으로서 문부식님의 문학적 성취는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몇 편의 시는 부러 외우고 다닐 만큼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았고, 그와 부미방에 대한 관심으로 김현장의 '빈첸시오, 살아서 증언하라'를 읽고서 까맣게 몰랐던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듯 가슴 떨렸던 기억이 새롭다.
체코 출신의 문학 평론가이자 신문 기자였던 율리우스 푸치크는 프라하의 판크라츠 게슈타포 감옥에서 자신의 처형을 기다리며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체코 공산당 기관지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보수주의자들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투옥을 당하며 활동하던 중 공산주의 언론의 불법화로 은신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십의 나이로 처형된 인물이다. '서승의 옥중 19년'을 읽으며 위의 글을 찾아 읽고, '진실한 생활에는 관객이 없다'는 말이 다분히 허영과 함께 가슴에 콱 박혔었다. 진실이니 진정성이니 하는 말에 경도된 자의식의 현혹이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이 책에는 다시 '현실 속에서는 관중이란 없다'로 바뀌어 번역되어 있는데, 문맥을 고려하면 후자의 번역이 더 맥락에 맞는 것 같다. 저자가 이 글을 쓸 당시는 파시스트의 광란이 극에 달한 시절,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과 연루되지 않았거나 무관심한 생활인들에게 보내는 전언이라고 좁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시스트나 전체주의와 같은 통치를 빙자한 적나라한 광풍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조이며 위협하는 불안의 공기 혹은 보이지 않는 명령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을 심문하는 게슈타포 감옥의 구금실을 누군가의 명명을 빌어 '극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나는 내 일생에 대한 영화를 백 번은 보았고, 세부적인 부분들은 수천 번 보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적어나가려고 한다. 내가 글을 끝맺기 전에 교수대 밧줄이 내 목을 조른다면,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의 '해피엔딩'을 써주리라 믿는다. 율리우스 푸치크 1943년 봄, 프라하 판크라츠 게슈타포 감옥에서 씀 이라고 단정하게 서문을 마무리한다. 차마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지일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군더더기도 절절한 감상도 없이 24시간, 죽어감, 267호, 감방, 400호, 주요 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단평, 1942년 계엄령 등과 같은 소제목이 붙은 비망록을 남겼다. 자신이 체포된 순간으로부터 시작해 공산당 운동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감옥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미친 시대에 대한 단상들을 여유로운 문체로 기록한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저자가 그 고난의 세월을 다 보내고 평화의 한 가운데 앉아 회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호흡하면서도 생에 대한 미련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한 감옥 안에 수감되었다는 사실 외에 안부도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내를 향한 사랑의 기록 역시 죽음 뒤의 만남과 절망 뒤에 올 희망의 가능성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사건의 제삼자인 듯 시종일관 냉정을 유지하며 때때로 블랙유머에 위트를 잃지 않는 그의 글에 킥킥 대다가 자세를 가다듬기도 하며 읽었지만, 그의 글이 비극의 기운을 머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경직되지 않은 신념의 소유자였고 신념에 휘둘리지 않는 따스한 가슴 역시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현실에 얽매여 꿈을 잃지 않을 용기와 두려움에 휩싸여 양심을 버리지 않는 단호함을 지닌. 적아의 명확한 구분과 신념의 선명성이 있었던 그의 시대가 남긴 인간 정신의 강인함을, 그는 마치 단막 드라마를 보여주듯이 생생하게 기록해냈다. 호의적인 체코인 간수의 도움으로 한 장씩 숨겨 밖으로 내보내진 이 책이 지금 존재한다는 것 역시 어쩌면 그의 낙관에 힘 입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심지어 유장한 낭만과 상큼한 쾌활마저 행간에 녹아 있는 그의 글이지만, 아무런 위협없이 침대를 구르며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한 일이었다.
2006-08-31 06:1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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