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12. 22:16

 

업앤다운앤다운앤다운...을 반복하는 기분 속에 하루를 보냈다. 제때 일어나 김창완 아저씨의 오프닝을 놓치지 않았고 어제와 달리 환한 햇살이 좋았다.

이사하고 짐이 대충 정리된 후부터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회색노트]를 읽고 매료된 후, 이후의 이야기들을 오래 궁금해했고 2000년에 민음사에서 전권이 간행됐을 때 정말 행복했다. 긴 호흡의 책을 잘 못 읽는 편인데, 자크에 홀려서 한 권 한 권 읽으며 이야기 속에 한참을 빠져 지냈었다. 계기가 되면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고, 이번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면 다시 빠져들어 인물의 마음에 이입하며 예전의 밑줄을 다시 보고 새롭게 밑줄을 긋고는 한다. 이제 막바지, 5권 중반을 넘어섰는데 반항적인 외톨이에서 숭고한 평화주의자로 성장한 자크는 '행동하기 위한' 선택에서 허망하게 죽었고 가스에 중독된 앙투안느는 죽어가는 중이다. 500쪽을 넘나드는 다섯 권의 책에서 다루는 십여 년 동안 인물들은 제각기 성장했고, 전쟁에 휘말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갈라진 운명은 안타깝고 비통하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책을 읽는 시간도, 이십 년 만에 다시 보니 새롭기만 한 [티보가의 사람들]도 좋지만 예전에 비해 책을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어쩐지 이 책을 빨리 다 읽어내야 다른 책들을 읽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두세 시간의 집중으로도 100쪽을 채 읽어내지 못하는 게 자주 시무룩하다.

3시 반이 조금 넘었을 때 엄마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두 번이나. 잘 없는 일이라 무슨 일이 생겼나 마음이 두근거리면서도 제발저림에 그대로 두었다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 눈이 많이 오는데 사무실에 있는지 걱정이 돼서 연락했다고 한다. 아... 통영은 흐렸던 어제에 비하면 맑은 하늘에 춥지 않은 날씨,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다. 양심이라는 게 그런 건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밖이라고, 괜찮다고, 하고 말았다.

오늘 읽은 [티보가의 사람들]에서 퐁타넹 부인은 앙투안느에게,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절단한 다니엘의 사고와 자신이 경험한 공명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퐁타넹 부인은 매종 라피트에 있는 티보씨의 별장을 빌려 군인 병원을 세우고 헌신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몸이 아파 새벽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정오가 가까운 시각에는 정신을 잃기까지 했던 날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가 다니엘이 부상을 당한 때라는 것을 열흘 후에 알았다는 것.

너무 갖다 붙이는 거겠지만... 평소 집에 오는 일이 없던 엄마가 12월 초 내가 집에 갔을 때 오빠한테 말해놨으니 차 타고 같이 집에 가자고 했던 것이나, 주중에는 특별한 용건이 있어도 톡을 보내는 정도였는데 불쑥 보이스톡을 보내고 하는 게 혹시 무슨 예감이 있어서였나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연극이며 콘서트 보러 가고 엘피며 씨디 사모으느라, 좀 더 커서는 데모하느라 엄마한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었는데... 그렇게 훈련된 덕분에 지금도 겉으로는 잘 모면하고 있지만, 암튼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다. 주절거리는 지금도.

기분도 그렇고 해서 오늘은 나가지 말까 하다가, 한 번 관두면 계속 그럴 것 같아 한 시간만 걷기로 하고 산책을 나섰다. 케이블카파크랜드에서 발개로를 거쳐 봉수돌샘길, 그리고 봉평동 메인스트리트로 내려와 집으로. 마음이 불편하니 텅 비어 줄 지은 케이블카도 괜히 다르게 보이고, 한편으로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거니 싶기도 하고. 오랜만에 존 레넌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걸었는데 하필 첫 곡이 "Mother"였고, 가사나 의미랑 무관하게 그냥 좋아하는 "The Luck of the Irish"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니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돌아와서는 6시부터 시작된 '꽃다지'의 유튜브 온라인 콘서트를 봤다. '꽃다지'도 좋지만 실은 정윤경 감독의 노래들을 많이 좋아했었고, 백수 되면서 후원도 끊었지만 어쨌든 날아오는 문자를 보니 반가워서 1인분을 하고 싶은 마음에 유튜브 실시간 라이브라는 걸 처음 접속했다. 콘서트의 타이틀이 "놀진 않았Show", 이미 오래 놀고 있는 입장에서 내 마음만 들여다 보며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는 주제라 좀 민망했다. 변영주 감독의 막되먹은 진행이 편안하기는 했는데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활기찬 인사와 대화와 이모티콘 들에 약간의 이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운앤다운앤다운... 내일은 기분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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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