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14. 23:59

 

통영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즈음부터 몇몇 부동산 블로그를 즐겨찾기해놓고 2-3년 동안 올라오는 매물들을 꾸준히 봤었다. 처음 이주하며 덜컥 바닷가 작은 집으로 갈 수는 없는 터라 혼자 살기에 적당한, 내 주제에 맞는 안신축아파트들을 눈여겨보았었다. 그러나 집을 구할 겸 한 달 살러 내려온 9월은 임대차 3법이니 뭐니 해서 시장이 어지러울 때였고, 몇 달 전인 5월 여행에서 본 부동산 창에 횡행하던 전세 매물 리스트는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이나 수도권 같은 영향은 없지만, 전세 계약을 4년씩 해야 되면 혹시라도 집주인들이 원할 때 세를 뺄 수 없을까봐 내놓았던 전세를 월세로 돌리거나 다시 거둬들였다는 이야기를 부동산에서 들었다.

한 달 거처였던 동네 부동산에 들러 월세로 나온 몇 군데를 보고 차를 내려준 도남동을 걷다가 눈에 띄는 부동산에 무작정 들어갔고 지금의 집을 만났다. 5월 여행에서 지금의 집 앞을 지나다가 바다도 가깝고 조용하지만 너무 외지지는 않고 맞은 편 새마을금고 지점 이름이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랑 같은 걸 보고서 혹시 운명? 하며 사진을 찍어뒀었는데, 신기했다. 집 보러 가느라 올라탄 실장님의 차 뒷좌석에 조선일보가 가득 쌓여 있었지만 경상도에서 그 정도는 디폴트겠거니, 앞서 다른 부동산에서 봤던 집들과 월세는 같으나 상태는 현저히 양호하고 현관문을 열면 어쨌든 바다가 보이는 집이 마음에 확 들어왔다. 

비록 하루지만 여섯 군데를 보았고, 이만한 집은 없다는 성급할지 모를 결론을 내렸다.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월세는 염두에 없었는데 다행히 집은 월세 혹은 전세로 나와 있었다. 공실이었기 때문에 입주 시기가 문제였는데 내가 이사할 수 있는 때는 빨라야 11월 중순이었다. 어쨌든 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다음 날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고, 실장님은 서울의 집주인과 여러 차례 통화하며 입주 시기를 맞춰주셨고 순전히 내 사정에 맞춰 처음 두 달은 월세를 내고 이후 전세로 전환하는 것까지 소통해주셨다. 주거복지산 줄 알았다(여성실장님 한정). 덕분에 많은 게 낯선 통영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선택해 이사할 수 있었고 이사한 후 고마운 마음에 한 번 찾아뵈었었다. 내일이면 나는 월세인에서 전세인으로 변신한다. 하여 산책의 첫 목적지는 부동산, 내일 이후 나는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큰 기쁨을 안전하게 확인하였다. 

산으로 가는 산책일기. 오늘의 산책길은 집에서 부동산을 거쳐 롯데시네마 통영점까지 이어졌다. 어제까지의 경험치로는 집에서 영화관까지, 4시 이후일 경우 <비밀보장>을 들으며 걷는 게 최적의 1만 보 걷기. 마침 롯데시네마에서는 '무비싸다구'(이름 참...) 쿠폰을 자주 날리고 있어 3천 원에 [늑대와 춤을]을 예매했다. 낮시간이어선지 나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붙어 앉은 그들은 러닝타임 내내 마치 자기 집 소파에서 영화를 보는 듯이 대화를 나눴다. 볼륨이 높지는 않았지만 몇 줄 뒤에 앉은 내게까지 충분히 거슬리는, 마치 층간소음처럼 잊을 만하면 시작되고 한 번씩 돌출하며 신경을 박박 긁는, 충분히 불쾌한 소리였다. 아, 나쁜 사람들. 덕분에 역시 영화는 저녁에 봐야겠다고 생각해 1천 원에 예매한 내일 4시의 [아이 엠 우먼]을 취소했다.

사실 오늘 가장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나갈 준비하며 오랜만에 듣게 된 <윤고은의 EBS북카페>, 걸을 때도 곱씹으며 착잡했었는데... 제대로 된 공부도 사색도 하지 않으며 즉자적인 감정에만 현혹되며 살아온 시간이 오래이다 보니, 안 그래도 많지 않던 단어들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심정만 강렬할 뿐 글로는 전혀 정리가 안 된다. 그럼에도 거칠게나마 되묻고 싶은 건, 주식이니 투자니 하는 제도와 행태가 정말 그렇게 가치중립적인 것인 양 다뤄져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윤고은의 그 낭랑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증권과 주식과 투자 등에 대해 알아본다며 '북카페 주식회사'를 상정하고, 요일별 코너를 계열사에 청취자들의 사연을 투자에 빗대어 한참 이야기하는데 듣고 있자니 사실 소름이 끼쳤다. 주가가 오르고 배당금이 높아지는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돈이 일하게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언명 뒤에 얼마나 많은 절규들이 있는지, 작가와 제작진은 정말 모른 체해도 되는 것일까? 차마 끝까지 못 듣겠어서 꺼버렸고, 부동산에서 나온 후로는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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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