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10. 22:58


어제 본 영화 두 편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리,라 봐야 나중에 다시 읽고 기억할 수 있게 줄거리와 인상 정도 기록하는 거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보았다'는 기억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어제 들었던 생각대로 영화를 나름 소화시키고 다음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하여 원래 오늘 보려고 했던 [미스터 존스]는 다음으로.

지난 일요일 도남관광지에서 들었던 트럼펫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여러 번 오다 보니 구석구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늘 멀찌감치 지나쳤던 유람선터미널과 관광정보센터 사이로 끝까지 가봤다. 연필등대가 정면으로 보이고 옆에는 낮은 데크전망대, 전망대에 오르니 바다 쪽과 요트정박지 쪽의 풍경이 익숙한 듯 새롭게 펼쳐졌다. 내려와 해안산책로로 향하는 길은 평소에 자주 다니던 방향과 반대였는데, 기준 시점이 달라지니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낯설어 신선했다.

마리나리조트에서 바로 이어지는 삼칭이해안길을 조금 걷다가 스탠포드호텔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통영국제음악당과 주차장을 공유하다시피 붙어 있는데 이쪽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라 그 역시 익숙하고도 새로운 광경. 풍경도 현상도 늘 보던 곳에서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른 위치에서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니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왕 새로운 길 가는 김에 이번에는 돌아가는 길도 그래보자 싶어 도남관광지에서 케이블카 쪽으로 처음 가는 길을 걸었는데, 뭐랄까... 지도앱이 도보길을 굳이 안내해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깨달음을 덤으로 얻었다.

고작(실은 무려) 열흘째이지만 매일 산책을 하면서 나름 정한 게 있는데, 걸음수 1만 보가 안 되는 날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11층 집까지 올라가는 거다. 걷는 걸 좋아하고 걷기 말고는 운동이라고 하는 게 없기도 하고, 서울에서도 보통 1시간 정도 거리는 걸어다녔었고 1주일에 반 이상은 1만 보 이상 걸었었다. 그런데 산책을 하다 보니 해저터널 건너 육지까지 갔다 오는 게 아니면 1만 보가 안 되고, 매일 그러기에는 보통 오후 산책이라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오전에 산책을 할 수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들으며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하고 멍도 좀 때린 후에 11시부터 2시까지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게 너무 좋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놓치기가 아쉽다. 보통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집 정리 같은 걸 하고 간단히 뭘 먹고 산책을 나서는 게 약간 루틴처럼 되었고, 그게 좋다. 해가 길어지면 4시쯤 집을 나서도 1만 보 산책을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어렵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걸음이 7천 보 정도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계단 오르기가 싫어서 나도 모르게 동 현관을 가로질러 케이블카파크랜드를 향했다. 이번에는 지난 번에 갔던 옆 골목으로 가봤는데 음... 쓰레기가 잔뜩 쌓인 공터와 겨울이라 가꾸지 않아 쓰레기 나뒹구는 텃밭 등을 지나야 했고, 케이블카파크랜드를 한 바퀴 돌고 8천 5백보가 넘었길래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겠군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향할 때 노란색 'ㄷㅈ고속관광' 버스를 보았다. 아, 선생님 보고 싶어라! 그러나 동 현관에 도착했을 때 확인하니 아직 5백 보 정도 모자랐고, 나는 정정당당하게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랑은 보통 1주일에 한 번 주말에 통화한다. 엄마는 늘 자식 걱정하고 만날 때면 엄청 세심하게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주는 것에 비하면 잦은 연락이나 방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서울에 있을 때도 상도동과 양평동, 버스 한 번 타면 도착하는 거리임에도 7년 동안 우리집에 온 게 몇 번 되지 않는다. 가끔 톡을 보내기는 하지만 안부 연락은 주말에 내가 하는 전화가 전부, 한 달에 한 번쯤 가족 식사 겸 냉장고 털러 가던 것도 코로나19 상황과 나의 이주로 텀이 늘었다.

나는 엄마를 좋아하고 통영도 좋아하지만, 엄마는 나를 좋아하나 통영은 싫어한다. 실은 일을 그만둔 것도, 내가 통영으로 이사한 것도 모른다. 이주를 마음 먹은 몇 년 전, 완충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통영에 가서 살겠다는 이야기를 한 번씩 했는데 그때부터 엄마는 통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는 아빠는 건너뛰고 엄마한테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얄미웠는지, 비겁하다며 짜증을 냈다. 생각해 보니, 아주 어려서부터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아빠와 담 쌓고 지내며 나는 엄마에게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시켜왔다. 돌이켜 보니 그건 아주 비겁한 짓이 맞았다.

6월 말에 일을 그만두고 9월에 통영에서 한 달 살며 집을 계약했고 11월에 이사를 했다. 12월엔 서울집 정리와 이런저런 일들로 안산 지인집에 3주나 있었고 그 때 엄마아빠의 50주년 결혼기념일이 있어 가족 식사를 했다. 이 나이에 일이며 이사며 엄마아빠의 허락 받는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 아무런 말 없이 이 모든 걸 질러버린 게 엄마아빠에게는 꽤 충격일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저 통영에 살고 싶어서 멀쩡히 다니던 사무실 그만두고 이사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게 간단한 사정만은 아니지만, 가족간에 공유되는 건 사실의 표면일 수밖에 없다. 이사 후 엄마와 통화하거나 집에 갔을 때는 마음이 너무나 불편해서 간만에 양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했냐?" "요즘 사무실에서 밥은 어떻게 먹냐?" "이렇게 추운데도 매일 출근해서 일하냐?" ... 대충 뭉개는 대답으로 거짓말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일요일이라 저녁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 주 서울이 너무 추워서, 안부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추위를 많이 타지 않고 코로나19 때문에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엄마란 걸 알지만, 원래 주말에나 한 번 전화하는 딸이니 그러려니 했겠지만, 많이 미안했다. 춥고 길 미끄러운데 출퇴근 조심하고, 밥 잘 챙겨먹고... 집에 먹을 건 있는지 한 번 와서 가져가면 안 되는지,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산책하면서 안부 전화 네 번만 견디고 설날 가서 엄마아빠한테 다 불자고 결심했는데, 이제 세 번 남았다. 오늘의 산책처럼, 이번 설에는 엄마아빠에게 정정당당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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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