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과 [걸]을 예매하고 3시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다.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걸으면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 참 좋은데, 들려주는 노래들도 좋지만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한 dj의 목소리와 그에 담긴 이야기들도 좋다. 오늘은 dj선곡으로 '결산 아닌 산'에 관한 노래들을 들려줬는데, <영상앨범 산>에 나온 소리라며 어떤 국악인의 목소리를 앞에 붙였고... 너무 웃겨서 들으며 걷다가 혼자 킥킥대며 즐거웠다. 나 나름, '유앤미블루' 학전 콘서트 갔던 사람인데ㅋ 이사하느라 짐 정리하다 보니 그때 나눠준 엽서도 있더라. 그냥 그렇더라고.
이어폰을 끼고 해저터널을 건너는데 어쩐 일로 "건너가면 바다가 보이냐", "터널 얼마나 더 가야하냐"고 묻는 이들이 두 팀이나 있었다. "건너가면 통영운하 바다가 보인다. 터널 끝까지 가는 데에 7분 정도 걸린다", "여기까지가 대략 80% 정도 온 거다"라고 답을 하면서 뭔가 통영사람 된 듯 기분이 좋아졌다. 통영산 지인이 일주일에 두어 번 걸어오는 전화, 엄마랑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통화, 어쩌다 지인의 안부 전화 말고는 말할 일이 없는 처지라 그것마저도 괜히 신이 나더라는 슬픈 이야기.
여객선터미널 즈음에서 방송이 끝났고, 바닷길에서 안길로 들어섰다. 이미 많이 지나다녔지만 그 얼굴 때문인지 멈춰서게 되는 '이중섭' 안내판을 지나 오늘은 백석 시인의 "오리 망아지 토끼"를 유심히 읽고(이 시 볼 때마다 너무 귀엽다.), 백석 시인이 [테스]를 번역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의 시들이 걸려 있는 골목에 테스 노래방이 있는 걸 다시 한 번 재밌어하며 길을 걸었다. 집에서 롯데시네마 통영점까지는 5.5km, 북신시장 근처부터는 처음 걷는 길이어서 기웃기웃 구경하는 마음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너무 많고 인적도 너무 뜸했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이 줌아울렛이라기에 남는 시간에 아이쇼핑이나 할까 했으나 1층에는 두꺼운 셔터가 철통처럼 내려와 있었다.
이 정도면 영화관 영업하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입구로 들어서니,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큰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3층으로 올라가니 그렇게나 크게 환영할 만하다 싶게 사람이 없었다. 예상대로 두 영화 모두 극장을 독차지하고 봤으며, 영화는 두 편 모두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작년에 극장에서 본 첫 영화가 [차일드 인 타임]이었는데 그저 그랬어서 설날 본 [페인 앤 글로리]를 첫 영화로 쳤는데(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하니까.), 올해 첫 영화 [완벽한 가족]은 뭔가 엄청났고 [걸]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잔뜩 고무된 지금의 마음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줄이라도 기록을 하고 다음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싶을 지경.
암튼 두 편의 영화로 벅차오른 마음을 다독이며 여운을 달랠 사이도 없이 버스정류장으로. 통영은 안 그래도 뜸한 버스가 밤이 되면 더욱 뜸해지므로 일단 집 근처로 향하는, 먼저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지도앱으로 노선 확인하니 봉평오거리를 지나길래 내려서 20분은 걸을 생각으로 충무교 지나며 여유롭게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안내방송에서는 다음 정류장이 미수해안로라고 해서 다리 건너자마자 급히 하차. 너무 추워서 집 앞까지 가는 기약 없는 버스 기다릴 용기는 안 나고 지도앱으로는 도보 25분 거리를 열심히 걸어 17분 만에 집으로 왔다. 덕분에 오늘의 걸음수는 11,767. 영화도 산책도 아주 성공적이었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