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막막하고 아련한 느낌이지만 어딘가 끌리는 제목, 부국제 홈페이지의 소개글과 이미지들을 보고 궁금해서 선택했다. 영화 상영 전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실제 거리에서 섭외한 일반인 청소년들을 따라다니며 취재해 몇 년간 촬영했고, 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시간에 맞서고, 한여름의 열기에 맞서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소개했는데 ‘시간에 맞서는’ 건 나도 하는 일이어서 내심 반가웠다.
주인공은 로마 근교에 살면서 부랑아처럼 거리를 떠도는 두 소년과 한 소녀다. 딱히 하려는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은 나란히 널브러져 멍을 때리거나 기차에 올라타 주인 없는 가방을 훔치고 로마와 근교의 곳곳을 돌아다닌다. 잘 굴러갈까 싶은 자동차나 한 대의 오토바이에 함께 탄 채 도로를 달리고, 거리에 주차된 차에서 기름을 훔치다가 기척에 사납게 짖는 개를 도발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동네 개울에서 장난삼아 가재를 죽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소녀가 할머니와 사는 집에서 얌전히 밥을 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알렉스는 막 스무 살이 되었고 브렌다는 알렉스의 아이를 임신했다. 알렉스를 늙었다고 놀리던 케빈은 부모가 늙은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하고 그들은 수긍한다. 브렌다가 임신하자 알렉스는 동네의 작은 목장에서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브렌다와 케빈은 멀리서 알렉스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둘이 로마에 나가 쏘다니다 키스를 하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자신의 사인을 남기던 케빈은 브렌다와 키스하며 묻은 립스틱 자국을 곳곳의 동상에도 남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주인에게 욕먹으며 양을 치는 일도, 권태롭고 무기력하지만 셋이어서 완전체 같았던 어울림도 갈수록 무의미해진다.
출산이 임박한 순간 브렌다의 곁에는 케빈이 있다. 꽉 막힌 도로, 뒷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브렌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던 케빈은 운전석에서 나와 도와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나는 겨우 열여섯 살이라며 제발 도와달라는 절규, 단 한 번의 간절함도 진지함도 내보이지 않았던 케빈이 마침내 위악과 허세를 내려놓고 목놓아 외치지만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복잡한 인파를 뚫고 도심의 도로를 질주하던 알렉스는 사고를 내고 쓰러졌다. 알렉스를 싣고 하늘로 떠오르는 구조헬기, 테르미니역을 알리는 간판을 응시하다 저 멀리 공중으로 점이 되어 사라지며 영화는 끝난다.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들과 편집, 정신없는 파열음과 이따금 엄숙하고 장중한 성가곡 같은 음악의 대비, 서사는 있지만 부수적인 요소인 듯 논리나 맥락을 초월한 전개로 가득한 영화였다. ‘로마’와 연결하기 힘든 빈한하고 황량한 배경과 기이하게 어그러진 인물들 덕에 간만에 키치니 세기말 같은 단어가 떠올랐고 내가 청춘일 적에 보았던 청춘의 영화들 몇 편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병 덕에 어떤 장면에서의 알렉스는 리버 피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어느 시대 어느 세대든 청춘이 겪는 삶과 세계의 무게 그리고 반항과 방황의 자장 같은 건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각자가 처한 현실의 디테일과 재질은 완전히 다를 것이므로 나도 겪었단다 같은 무엄한 심사는 아니고 말이다.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영화에 대해 “모든 이미지,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와 ‘우리 세대가 잘 아는’ 예술 영화의 소환”이라고 덧붙이고, 이미지의 최면 효과와 영화의 힘을 믿는 자신이 촬영하며 느낀 영화 속으로의 이동을 관객들도 경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미지보다는 서사에 민감한 구세대이고 애니와 만화에 문외한이며 1992년생이라는 감독과 동세대일 수 없는 관객으로서, 보았다는 사실이 주요 기억이 될 영화였다. 찬사 가득한 영화에 대한 나의 미진한 느낌을, 스크린 아래를 이미 살짝 침범함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이따금 왼쪽 팔도 들었다 놨다 했던 앞자리 관객 탓으로 돌리지는 않겠다.
10/11 CGV 센텀시티 스타리움관
[An Endless Sunday]
국가/지역Italy/Germany/Ireland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15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Director: Alain PARRONI 알랭 파로니
Cast: Enrico BASSETTI, Zackari DELMAS, Federica VALENTINI, Lars RUDOLPH
Program Note
<끝없는 일요일>은 올해의 즐거운 발견이다. 브렌다, 알렉스, 케빈은 로마 외곽의 빈민촌에 사는 삼총사다. 돈도 없고 일도 없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이들은 해변에서 어울려 놀고 로마의 백화점이나 명소를 여행객처럼 쏘다니며 시간을 때운다. 우울하지만 젊은 기운으로 가득한 이들은 청춘의 마지막 순간을 불태우며 영원한 우정을 꿈꾼다. 이들의 모습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덥고 긴 여름의 어떤 일요일과 닮아 있다. 브렌다가 임신했을 때 알렉스는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처음 직면한다. 거침없는 시나리오, 풍부하고 짙은 농도와 색감, 다이내믹한 편집으로 완결된 <끝없는 일요일>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탈리아 청춘의 초상을 역동적이고도 가슴 아프게 그린다. 창의적이면서 대담하기 그지없는 갓 서른의 알랭 파로니 감독은 감동적인 첫 장편 <끝없는 일요일>로 무서운 이탈리아 신예 감독의 탄생을 알린다. (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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