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늦게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보급된 나라라는 부탄, 2006년 국왕이 퇴위하며 민주화와 현대화 추진을 선언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처음 경험하는 민주주의와 선거는 국왕 치하에서 문제없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혼돈의 신세계를 선사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정당의 후보들이 등장해 지지를 호소하고, 최초의 선거를 잘 치르기 위한 사전 모의 선거가 각지에서 진행된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의 우라 마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민주적 절차와 주권자의 권리 행사는 시골 사람들에게 낯선 일이다. 선거인 명부 정리를 위한 주민 등록에서부터 난관이 시작된다. 생일을 묻는 질문에 보름달 어쩌고 하는 답변이 돌아오고 이름 없이 살아온 이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이 마을에 도착하고 사전 모의 선거가 본격화되면서 정당 지지 여부에 따른 주민들의 반목이 생겨나고,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거부하는 주민들도 생겨난다. 선거 운동 교육이라며 정당별로 지지자를 줄 세우고 서로를 도발하도록 유도하는 공무원에게, 그 자리를 떠나며 한 노인이 남기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왜 서로 무례하게 굴도록 가르치죠?”
마을의 젊은 부부인 초모 가족도 격동의 당사자가 되었다. 어린 딸 유펠을 도시에서 교육시키고 후보에게 잘 보여 나중에 출세시키고자 선거 운동에 나선 남편은 다른 당을 지지하는 장모와 불화를 겪는다. 마을 주민 다수와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아빠 때문에 유펠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더 나은 교육 기회나 장래의 성공보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초모는 혼란스럽다. 민주화와 함께 당도한 현대화의 상징은 텔레비전이다. 큰 화면의 새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상점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007’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젊은 타시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우라 수도원의 큰 스님은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다 일을 바로잡을 총 두 자루를 구하라는 명을 내린다. 큰 스님의 지시를 받은 타시 스님의 수소문에, 마을의 한 노인이 선대로부터 간직해온 총을 전달한다. 직전, 수도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벤지는 부탄에 입국한 미국인 총기수집가 론의 부탁으로 바로 그 총의 거래를 통역했다. 남북전쟁 시절에 사용된 총이라며 반색하는 론의 거액 제안에 난감해하며 훨씬 작은 액수를 제시했던 노인은, 돈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며 그들이 돌아간 사이 타시 스님이 찾아오자 총을 건넨 것이다.
돈 가방을 들고 돌아와 극적으로 타시 스님을 마주한 그들은 총을 돌려받으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카달로그를 내밀며 교환을 청한 끝에 ‘007’에 나오는 AK47 소총 두 자루를 요구하는 타시 스님과 극적 합의한 론과 벤지는 인도를 통해 AK47 소총을 들여오기로 하고 부탄의 암거래상을 통해 이를 손에 넣는다. 한편 정부는 여행객을 가장해 입국한 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 우라 마을의 사전 모의 선거 현황을 취재하는 뉴스 리포팅의 배경인 상점 앞에서 나란히 앉아 음료를 마시는 벤지와 론이 텔레비전 화면에 포착되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다.
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달리, 사전 모의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파견 공무원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독려한 결과 10%에 불과했던 등록률은 98%를 기록했다. 결과는 다수의 지지를 받던 파란 당도 유펠을 외롭게 만든 빨간 당도 아닌 노란 당의 승리, 참여자의 95%의 표가 몰린 압승이다. 선거로 인해 전에 없던 불화를 경험한 마을 사람들은 ‘국왕의 색’인 노랑을 택함으로써, 공동체가 마주한 격변과 불필요한 갈등을 스스로 봉합하고자 했을까.
큰 스님의 디데이, 마을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들었다. AK47 소총 두 자루를 챙긴 벤지와 론, 그들을 추적 중인 경찰들도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다. 큰 스님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화합의 탑’ 건설을 선언하고 그 기반 자리에 증오, 갈등, 고통의 상징물을 묻기로 한다. 마을의 노인이 타시 스님에게 건넨, 대륙을 건너와 티베트인 수백 명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귀한 총이 제일 먼저 던져진다. 극적으로 도착해 경찰들과 마주한 벤지와 론,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AK47 소총을 탑에 바치며 위기를 모면한다. 영화는 부탄이 2008년 3월, 첫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체제 전환을 이루었다는 후일담을 전하며 마무리된다.
[교실 안의 야크]의 좋았던 기억으로 선택하면서도 소개의 내용은 딱히 매력적이지 않아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도시 문물과 현대적 삶에 물들지 않은 마을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이 희화화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인간적인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고와 셈법이 주는 감동이 컸고, 우라 마을이 자리한 산악 풍경과 파란 하늘 못지않게 큰 스님이 기획한 대화합의 한 마당이 선사하는 청량감이 엄청났다. 평화와 화합을 열망하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차고 있던 총을 탑의 기반에 바치는 경찰들, 론의 쓰린 속을 알 리 없는 주민들이 의례에 쓰인 남근상을 그에게 전하는 장면 등 사뭇 진지한 상황에서 유발되는 웃음이 유쾌했고,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적절한 깊이와 밀도로 환하게 그려낸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 우라 마을에서는 두 대의 텔레비전이 등장하는데 브랜드가 각각 삼성과 엘지였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한글이나 한국어를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으니 이례적인 건 아니지만, 전날 본 [바람의 도시]에서 마랄라가 가고 싶어 하는 나라로 한국이 등장했을 때도 느꼈던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위상이랄까. 부심류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미발전 상태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느끼는 친밀감에 비해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 혹은 인식은 전반적으로 어떤 우위를 전제한 무지의 상태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맴돌었다. 막 비유하자면 어릴 적 친척 중 누군가 이민 가있는 미국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에 비해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한국은 염두에 없는 상태 같은 것? 한때 이주 단체 활동을 했음에도 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나의 경우는 확실히 그러한데, 영화 덕분에 ‘언젠가 다시 유럽’, ‘언젠가 남미’를 품고 있는 마음에 흐릿하게 ‘먼저 아시아?’가 더해졌다.
영화제 후반부임에도 GV가 있어 더 좋았고,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길버트 그레이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 더 반가웠다. 상기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즐거운 tmi를 전해준 벤지 역할의 남자 배우, 영화에서처럼 차분하게 소회를 이야기하는 초모 역할의 여자 배우도 함께여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부탄이 작은 나라인 건 알았지만 인구가 70만 명 정도이고 대다수 배우들이 연기 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건 놀라웠다. 원래 하던 연기보다 표정이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디렉팅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만족했다는 남자 배우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약간은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감독은 첫 번째 영화를 평론가의 관점으로 다시 보고 단선적인 구성 등 미비점을 보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부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장르 영화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감독의 다음 영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의구심 없이 선택할 것 같다.
[교실 안의 야크]를 만들기 한참 전 관객으로서 부국제에 온 적 있었다는 감독은 자신의 두 작품을 선정하고 초청한 프로그래머에 대한 고마움이 큰 것 같았다. 그가 이 이야기할 때 옆에서 민망한 듯 말리는 제스처를 했던 프로그래머는 GV의 마지막에, 감독과 배우들이 관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제안하며 양해를 구했다. 영화를 보고 GV에 참여한 것뿐인데 예기치 못한 흐뭇함과 행복감에 함께 취하는 시간이었다.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The Monk and the Gun]
국가/지역Bhutan/United States/France/Taiwan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07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Director: Pawo Choyning DORJI 파오 초이닝 도르지
Cast: Tandin WANGCHUK, Deki LHAMO, Pema Zangmo SHERPA, Tandin SONAM, Harry EINHORN, Choeying JATSHO, Tandin PHUBZ, Yuphel Lhendup SELDEN, Kelsang CHOEJAY
Program Note
2006년의 부탄. 마침내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도착했다. 그리고 왕정국가 부탄에서 역사상 첫 번째 선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거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왕을 두고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부터 교육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먼저 모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마을의 존경을 받는 큰 스님이 총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여전히 정치보다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탄에서, 첫 번째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오해들과 이에 대한 ‘부탄식 해법’을 말하는 이 영화는 무해하고 아름답다. 데뷔작 <교실 안의 야크>(2019)로 202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다.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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