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3. 10. 26. 15:16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새벽 5시 50분 알람이 울리자,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안젤라의 하루가 시작된다. 미리 약속을 잡고 찾아간 인터뷰이의 집에 당사자는 없고 가족들만 기다리고 있다. 낚시터에 있다는 산재 노동자와 배경을 바꿔 줌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안젤라는 또 어딘가로 향한다. 잠시 후 우스꽝스럽게 굵은 일자 눈썹을 한 인공적인 얼굴의 사내가 등장한다. 자신을 ‘보비처 형’이라 칭하며 과장된 제스처로 거친 욕설과 음담패설, 혐오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는 틱톡 필터 속 안젤라다. 

 

안젤라는 한 다국적 기업이 제작하는 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할 산재 노동자를 찾기 위한 사전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물망에 오른 노동자들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하며, 적잖은 출연료에 대한 기대를 적당히 고취하면서도 산재를 기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안전한 노동’에 방점을 찍는 발언을 조언한다.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다 다쳐 일을 쉬는 여성, 회사 입구에 방치된 낡은 안전대 때문에 퇴근길에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인 남성 등 산재 노동자들의 상황은 안타깝고, 숨 가쁘게 일에 치이는 안젤라의 처지도 못지않아 보인다. 

 

적당한 공감과 사려 깊은 태도로 인터뷰를 마친 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안젤라는 거리낌 없는 보비처 형으로 변신한다. 이른 새벽부터 종일 운전대를 잡고 이 집 저 집 방문해 산재 노동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고되고, 와중에 부쿠레슈티에서 꽤 멀리 왕복 이동해야 하는 인터뷰와 다른 업무도 일방적으로 추가됐다. 부족한 잠과 부족한 팀원으로 인한 과부하를 혼자 감당하며 일하는 안젤라에게 틱톡은 과로와 스트레스의 무게를 잠시나마 날려 보내는 출구다. 

 

1981년의 시공간에도 안젤라가 있다. 그는 부쿠레슈티의 택시 운전사다. 무질서하고 혼잡한 도로에는 조급하게 경적을 울리고 시비를 거는 운전자도, 여성 운전자를 만만히 보는 승객도 적지 않다. 와중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안젤라는 영화의 주인공답게 자주 슬로우 화면으로 포착된다. 승객으로 처음 만난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안젤라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40여년 후 두 안젤라는 산재 노동자의 엄마와 사전 인터뷰 담당자로 마주한다. 안젤라의 아들은 퇴근길에 사고를 당해 휠체어 생활 중인 오비디우다. 산재를 노동자 책임으로만 돌리는 기업과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적잖은 출연료에 인터뷰에 응했고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영화는 홍보 영상 촬영 현장에서 마무리된다. 산재 사고를 당한 공장 입구를 배경으로 오비디우와 아내와 딸, 어머니 안젤라까지 가족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대본 없이 오비디우가 사고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된 촬영은,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본래의 목적을 향해 변질된다. 사고의 핵심이었던 입구의 안전대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오비디우의 발언 내용은 제작자의 요청에 따라 누락되거나 정정된다. 다국적 기업이 주체가 된 산재 예방 홍보 영상 제작이 기만적 촌극일 수밖에 없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촬영 과정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익숙한 현실을 환기한다.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만을 대략 요약한다면 이렇게 정리해도 될지 모르겠다. 다국적 기업의 말단 혹은 외주 노동자인 안젤라의 현재는 흑백 화면으로, 택시 노동자인 안젤라의 과거는 컬러 화면으로 전개되면서 “안젤라, 살아가다”, “안젤라, 나아가다”라는 부제와 마지막 촬영 현장 에피소드까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구성된 영화다. [배드 럭 뱅잉]의 경험으로 산만하고 과잉인 감독의 연출은 예상했지만 틱톡이나 sns필터 문외한이라 보비처가 등장한 처음에는 맥락 파악이 어려워 당황스러웠다. 보비처의 정체를 인지하고 두 개의 시공간에서 각기 재현되던 안젤라가 만나는 장면부터 몰입도가 확 높아졌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인사 영상에서 감독은 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를 노동 착취라고 소개하면서 미디어로 접한 한국의 노동 현실을 언급하고, 매우 루마니아적인 영화지만 “국지적 영화의 힘”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코미디, 로드무비, 몽타주, 작은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들어있다고도 밝혔는데, 그에 더해 나로서는 소화불량이었던 각종 인용 텍스트들도 무지막지했다. 영화가 끝난 후 마지막까지 올라가는 몇 편의 하이쿠 자막에 살짝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미지와 텍스트 들을 공세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감독의 개인 취향인지 세계를 반영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건지 궁금하다.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부캐’ 보비처의 “극단적 희화화” 표현은 나올 때마다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과하고 독한 표현들이 착취적 상황을 탈피하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으로 설정한 것인지 약간 감독의 재질인지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될 때 침대 옆에 놓여 있던 프루스트의 책 표지나 정차 중에 다가오는 상인에게 몇 권의 책을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에, 전반적으로 터프하지만 지적이고 진중한 면도 갖춘 안젤라 캐릭터와 보비처의 자동 전환이 내게는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배우들의 향연 속, 후반부에 ‘루마니아의 숲을 망치는 오스트리아 다국적 기업’의 임원으로 니나 호스의 등장은 낯선 루마니아 영화에 유럽성(?)을 더하는 묘한 느낌이었다. 

 

부국제에서 처음 봤던 감독의 작품 [아페림!]은 황량한 배경에 이는 먼지와 소동을 담은 창백한 화면의 기억 정도가 남아 있지만 [배드 럭 뱅잉]은 극단적인 표현의 충격 못지않게 동시대 세계의 초상을 그려내려는 감독의 의욕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이번 작품도 구조화된 노동 착취와 이미지/영상의 실재 혹은 활용을 연결시킨 세계에 대한 풍자가 상당했고, 긴 영화 안에 많은 걸 꽉 채워 넣은 감독의 의도를 조금 더 이해하려면 적어도 한 번은 더 봐야할 것 같다. 

 

러닝타임의 부담을 이겨내고 이 영화는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 언젠가 어디선가 루마니아 영화제 같은 기획전으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고, 정말 그런 게 진행된다면 몇 년 전 부산에서 봤던 [전사, 페렌타리 이야기]도 상영해주면 좋겠다. 아주 가끔 떠오르는 영환데, 이 영화에서 페렌타리 지역이 언급되어 괜히 반가웠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해외여행 갈 돈도 용기도 의욕도 없는 자로서, 멀고 궁금한 나라 구경에 영화만 한 게 없다. 영화제 예매를 준비하면서 감독 다음으로 제작 국가를 살피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암튼 영화 덕에 주마간산이나마 루마니아 반가웠다. 

 

 

10/11 영화의전당 중극장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

 

국가/지역Romania/Luxembourg/France/Croatia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63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B&W

Director: Radu JUDE 라두 주데

Cast: Ilinca MANOLACHE, Ovidiu PÎRȘAN, Nina HOSS, Dorina LAZĂR, Lászlo MISKE, Katia PASCARIU

 

Program Note

안젤라는 다국적 기업이 제작하는 산업 안전 홍보 영상에 출연할 인물을 물색하느라 부쿠레슈티 시내를 밤낮 누빈다. 과로에 시달린 안젤라가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틱톡에 등장하는 ‘부캐’ 보비타는 위악적인 조롱과 혐오 발언을 퍼부으며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되어준다. 전작 <배드 럭 뱅잉>(2021)을 통해 증명한 바와 같이, 풍자의 대가 라두 주데는 어지러운 과잉의 이미지와 필터링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여곡절 끝에 적임자가 캐스팅되고 홍보 영상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후반부, 휠체어에 앉은 노동자의 목소리가 클라이언트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점점 힘을 잃어가고 진실은 마침내 몇 줄의 자막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목도한다. 이처럼 지구의 종말은 갑자기 찾아오는 재앙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잡아 자전할 동력을 서서히 앗아가는 것임을, 그리고 이미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된다. (박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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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