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6년 영국 북부, 40년 전 광산이 폐쇄된 후 쇠퇴한 마을에 수십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당도한다. 대다수가 종사하던 산업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떠나고 집값은 나날이 떨어지는 마을의 주민들은 달갑지 않다.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자 수십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고 일부는 원색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와중에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던 소녀를 발견하고 흥분한 남성이 카메라를 빼앗아 실랑이를 벌이다 떨어뜨린다. 봉사자들의 제지와 안내로 건물 내부로 이동한 난민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기색이 역력하다.
마을에 하나 남은 펍 ‘The Old Oak’의 주인 발렌타인은 노동조합과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열심이었던 전직 광부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주민들은 펍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불만과 불안을 늘어놓는다. 동네에 한 번 와보지도 않고 빈집을 사들이고 되파는 기업형 부동산 회사,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정부 방침이라며 정착을 위해 마을로 이주한 난민들을 욕하는 주민들은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점점 보수화되었다. 폐광 이후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발렌타인도 마찬가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던 너른 홀을 걸어 잠근 게 20년 전이고 방향 잃은 비난을 늘어놓는 몇몇 단골들만 드나드는 펍을 언제까지 운영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도착하던 날 카메라를 고장 낸 남성을 찾기 위해 도움을 청한 일을 계기로 발렌타인은 난민 소녀 야라와 가까워진다. 변상을 받아내는 데에 실패하자 발렌타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오래 묵혀둔 옛 카메라를 수리해 선물하고, 야라는 다시 자신의 시선을 담은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찾기 위해 오랜만에 들어간 너른 홀의 벽에는 광산도 노동조합도 마을도 활기 넘치던 시절의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을 주시하는 야라에게 상황이며 인물에 대해 설명해주는 발렌타인에게도 잊고 지냈던 좋았던 날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에게 외면당하는 무의미한 삶을 끝내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다를 찾았던 게 2년 전이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강아지 마라와 교감을 나누면서, 평생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단골들이 드나드는 펍을 무심히 지키는 것이 발렌타인의 일상이었다. 갈등과 혼란도 함께일망정, 새로운 존재들의 이입은 마을과 발렌타인에게 변화를 선사했다. 난민 구호 활동을 하는 옛 동료 로라의 요청으로 생필품 전달을 돕고, 카메라 선물에 감사하는 야라의 초대로 집을 방문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면서 무기력했던 마음이 환기되기 시작한다. 펍의 단골들은 그런 발렌타인에게 쓴소리를 하고 때로 조롱하지만, 가라앉은 시기에도 차별과 혐오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그는 개의치 않는다.
활동은 “우리는 함께 먹고 똘똘 뭉친다”는 슬로건과 함께 마을이 하나였던 광산 파업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소환한다. 20년간 방치했던 너른 홀을 주 2회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는 식사 공간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주민들의 재능 기부로 낙후한 시설을 수리하고 단체들의 물품 기부를 받아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이주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여든 남녀노소는 같은 음식을 먹고 야라가 찍은 이웃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호혜로운 공존이 과거의 전유물만은 아님을 예감한다. 하지만 임시방편으로 수리한 홀의 시설은 완전치 않고 그런 모습이 못마땅한 단골은 밤중에 몰래 설비를 건드린다. 어렵게 피워 올린 희망을 단번에 꺼뜨린 이의 정체를 알게 된 발렌타인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그의 집에 찾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야라의 집 앞에 다시 주민들이 북적인다. 생사를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져 영국으로 건너온 가족들은 뒤늦게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었다. 살아 있다는 반가움 못지않게 살인적인 환경에 고통 받을 아버지를 염려하며 눈물 흘렸던 야라는, 결국 부고를 전해 들었다. 얼마 전 유일한 가족인 마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던 발렌타인에게 야라와 가족들은 각별한 위로를 전했었다. 여전한 슬픔을 안고 발렌타인은 야라의 집을 방문해 조문한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까이에서 또 먼발치에서 조의를 표하는 주민들 중에는 펍에서 불만을 늘어놓던 이도, 홀의 설비를 건드린 이도 있다. 거리의 기척에 밖으로 나온 야라의 가족들과 조심스레 위로를 전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들의 첫 만남 풍경과 사뭇 다르다.
세계의 변화와 혼란, 그 속에서 갈수록 힘겨워지는 삶의 주인공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메시지는 ‘용기, 연대, 저항’이다. 각자의 사정과 복잡다단한 갈등을 과연 “우리는 함께 먹고 똘똘 뭉친다” 정신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도 싶지만, 나와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의 힘을 믿고 꾸준히 움직인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기대나 희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과거 자신이 가졌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발렌타인의 모습이 좋았다. 활동 유무와 별개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조금 더 나아가는 일에도 용기 낼 수 있는. 마을의 부정적인 여론을 주도하는 조연들에 비해 별로 포커싱되지 않았던 주민들이 발렌타인의 홀과 야라의 집 앞에 등장할 때의 뭉클함도 기억하고 싶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늘 같은 맥락의 변주 같기도 하고 때로 ‘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수십 년 누적된 단단한 진심이 주는 힘과 감동이 있다. 이 작품이야말로 마지막일 수 있겠구나 싶어, 몇 년 전 [쏘리 위 미스드 유]([미안해요, 리키])를 보고 감격에 젖어 언젠가 부산에서 켄 로치 감독의 GV를 볼 수 있길 바랐던 마음이 떠올랐다.
10/10 CGV 센텀시티 3관
[The Old Oak]
국가/지역United Kingdom/France/Belgium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13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Director: Ken LOACH 켄 로치
Cast: Dave TURNER, Elba MARI
Program Note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한 마을, 예전엔 광산의 광부들로 활기찼던 마을이었지만 폐광 이후로 떠나지 못한 일부 주민들만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빈집이 늘어남에 따라 마을의 집값은 떨어지기만 하고 주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는 어느 날, 영국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주민들과 시리아 난민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한 시리아 여성과 마을에서 유일한 술집을 운영하는 한 남자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나의 올드 오크>는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의 약자를 대변해 왔던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26번째 장편이다. 그의 무수한 전작들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만, 그 가운데 힘겹게 솟아나는 인간애가 강조된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켄 로치 감독의 열정은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608&c_idx=383&sp_idx=0&QueryStep=2
* 거장의 마지막 시선은 ‘희망’이었다··· 칸에서 만난 켄 로치, 경향신문 20230531
https://m.khan.co.kr/culture/movie/article/202305310600021#c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