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12. 20. 17:47

  

 

봄에 봤던 케네스 브레너의 [벨파스트]를 떠올리며 펼친 책장 속 이야기는 "목요일, 1969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또래 친구들과 모여 놀며 '트러블'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일곱 살 어밀리아 러빗의 일상이 달라지는 시점이다. 주머니 속 애벌레들을 만지작거리며 골목에서 뛰놀던 어밀리아는 창문과 문을 널판으로 막고 불을 끈 어두운 집, 식탁 아래에 기어들어가 영문 모를 바깥 세상의 총성과 폭력을 피하는 일에 점차 익숙해진다. 동네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거칠고 낯선 존재들이 활보하며 이따금 현관문을 두드린다.  

 

세계는 지옥이 되었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로 나뉘어진 동네에 상주한 영국군과 경찰과 IRA 모두가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숨죽인 거리에서는 조용한 참극이 이어진다. 부모도 선생도 늘 화가 나있고 아이들은 당연한 일처럼 폭언과 폭행에 적응하며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노는 것처럼,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도 일상이 된다. 소설은 디테일한 배경 설명과 함께 등장했던 인물의 죽음을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무심하게 다룬다. "동기 없어 보이는 범죄"가 만연하는 동네에서 영국군이 되어 벨파스트에 온 사촌이 그렇게 수순처럼 죽어 사라지고,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은 제각기 미친 상태가 되어 살아간다. 

 

폭력이 일상이 되고, 폭력의 기억이 유령처럼 휘감은 삶은 판단중지와 환각의 세계를 오간다. 극한과 보통이 뒤섞인 '평범한' 세상은 거리에서 주운 수십 개의 고무탄을 어린 아이의 보물로 만든다. 다정함이 사라진 가족 사이에는 맹목적인 적대와 무관심이 가득하고, 어려서부터 거리를 함께 뛰놀며 자란 친구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무릎쏘기"를 당하고 영화 속 "러시안 룰렛"을 재연하며 죽어간다. 벨파스트의 젊은이들 역시 디스코와 록 음악에 열광하며 청춘을 통과하지만,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늘 종이 한 장 차이로 지척에 있다.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나 이를 유일의 질서로 내면화하며 성장한 이들의 일상은 극단적으로 각박하고 피폐하다.

 

자연스러운 환경이 된 위험은 어느 날 느닷없이 누군가의 삶을 중단시키고, 살아가는 이들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다. 도덕과 윤리가 사라진 세계를 채우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과 찰라의 희열을 좇는 중독이다. 한 무리처럼 어울리며 떼로 몰려다니는 친구들 속에서도 각자 외롭고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기댈 수 없는 유년기를 보낸 청년들은, 미치거나 죽거나 떠난다. 서로에 대한 혐오가 공기처럼 떠돌고 우정도 사랑도 꿈도 무용지물로 전락한 세계가 선사하는 두려움과 어둠은 무감하게 견디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존재를 재생산한다. 강인해보였던 어밀리아의 친언니 리지는 오랫동안 모은 약을 먹고 목숨을 끊고, 마침내 런던으로 떠난 어밀리아는 뇌리에 박혀 삶을 좀먹는 고향의 기억에 잠식당해 쓰러진다.   

 

한 세대의 시간을 꽉 채운 '트러블'의 종료 가능성이 드러나는 1994년, 고통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친구들은 "소풍"을 떠난다. 물리적인 폭력의 난무 속에 강박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아남은 이들에게 난데없는 어밀리아의 제안은 낯설지만 궁금한 것이 되었다. 우발적으로 오른 배를 타고 닿은 곳은 래슬린 섬,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적대는 물론 친밀한 이들 사이에도 무관심과 혐오가 가득한 벨파스트의 축소판 같은 곳이다. 의도와 무관한 오해와 억측이 위험을 부르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 무사귀환하는 어밀리아와 친구들을 확인하는 것이 책을 읽는 동안 유일하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잔인한 현실에 냉정하게 거리를 둔 문체에 실린 이야기는 조마조마한 흡인력을 잃지 않는다. 주로 어밀리아의 시선에서 기술된 25년간의 시간 속에 제각각의 사연과 함께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미치거나 죽고 우연히 살아남는다. 영화 [벨파스트]에 담긴, 폭력 속에서도 살아숨쉬는 다정하고 따뜻한 기억은 케네스 브레너가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노 본스] 속 현실은 출구 없는 잔혹함과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며 버티다 끝내 무너져내리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옥을 통과해 결국 살아남은 작가의 생존기이자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이들을 향한 진혼곡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애나 번스•홍한별 옮김
2022.6.20초판1쇄발행,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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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