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걸림돌'에 잔뜩 긴장했는데, 각 작품에서 키워드로 삼는 원리와 이론에 대한 이해에의 욕심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다섯 편의 작품은 20세기를 배경으로 이전부터 이어져온 과학적 발견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과 경합, 세계의 심연을 보고 만 비범한 천재의 운명, 문명과 인류의 진보를 만들어낸 과학의 양면성과 그를 이끌어온 과학자들의 광기와 고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사의 글'에서 작가는 "이 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다.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커진다"(255쪽)고 밝히는데, 초반의 두 작품이 에세이처럼 느껴졌던 이유였던 것 같다.
첫 번째 수록작인 "프러시안블루"는 2차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선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782년에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 프러시안블루에서 분리된 부산물"(16쪽)이었던 시안화물(청산)이 근대에는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안료로 2차세계대전에서는 수많은 이들을 중독에 빠트리고 자살과 학살 물질로 쓰였던 역사를 전방위로 살핀다. 더불어 1차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사용한 화학전의 기수였고 질소 비료를 개발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36쪽) 화학자 프리츠 하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과학의 빛과 명암을 에세이처럼 기술한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주인공은 1차세계대전 중 참호에서 "항성의 질량이 주변의 시공간을 구부리는 방식을 완벽하게 기술"(46쪽)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해를 구해 편지를 보낸다. 독일의 저명한 천문대장이었던 슈바르츠실트는 명예심과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한 전장에서 과학적 열정을 발휘하며 복무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맹목성에 회의하며 자신의 발견에 매달리다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의 발견에서 중요한 것은 "항성이 짜부라들어 밀도가 계속 커지다보면 중력이 너무 세지는 바람에 공간이 무한히 휘어져 스스로를 감싸고 만다. 그 결과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영영 단절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48쪽)이라는 것이었다. 이 '특이점'은 기존 물리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목격하는 참상의 곳곳에 겹쳐져 그를 매료시키며 공포로 몰아갔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블랙홀' 현상을 예언한 천재는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받았을 때 이미 전쟁의 여파로 만신창이가 되어 숨진 상태였다.
"심장의 심장"에는 수학자 모치즈키 신이치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등장한다. 모치즈키가 스승으로 여겼다는 그로텐디크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좌파 일간지 기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전쟁 시기 전장으로 떠났던 부부는 공화군이 패배한 후 프랑스로 피신해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아버지는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어머니는 1957년 결핵으로 사망한다. 무국적자로 태어나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잃은 그로텐디크는 일찍이 수학 천재로 명성을 얻었고 "수학적 대상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광선"(95쪽)인 모티브라는 관념을 탐구하며, "수학적 우주의 핵심에 자리잡은 이 기이한 실체를 '심장의 심장'"(95쪽)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연구에 정진하던 그는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과 세계적인 저항운동에 뛰어들고 40대에는 '거대한 전환점'이라 부른 방향 전환을 통해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꾸렸으며 이후에는 '생존과 삶'이라는 단체를 창설해 자급자족과 환경 보호, 평화를 위한 활동에 매진했으나 공동체는 변질되고 결국 해산한다. 후에는 명상과 집필을 하며 은거하면서 신비주의자의 삶을 살았고 2010년에는 자신의 모든 저작물과 기록에 대한 회수와 미래 판매 금지를 요구했고, 개봉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모교인 몽펠리에대학교에 문서 상자 네 개를 기증했다. 2014년 11월 13일 사망한 그로텐디크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모치즈키, 정수론의 중요한 증명을 발표하고도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았던 그가 2014년 몽펠리에대학교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강연 전날 불미스러운 일로 경비에게 쫓겨난 이유는 마지막에 드러난다. 실존했던 두 사람을 향한 작가의 애틋한 상상력이 찡한 결말이었다.
표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1920년대 중반부터 입자의 파동과 관련한 이론으로 경합을 벌인 에르빈 슈뢰딩거와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드 브로이 공작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기본 입자들의 실체를 알고 싶었으며 모든 자연 현상의 공통된 뿌리를 파헤치고 싶었"(122쪽)던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은 당시 과학계의 슈퍼스타로 등극한 슈뢰딩거의 이론에 밀려 무시되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이 강박과 중독으로 이어진 하이젠베르크는 요양차 떠난 헬골란트 섬에서 기이한 환각 체험과 함께 양자계를 모형화한 정합적인 행렬을 완성한다. 읽을 때는 흥미로웠지만 읽고 나니 사라져버린 양자역학을 둘러싼 이들의 주장 내용을 다시 톺아볼 엄두는 안 나지만, 책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긴 이야기는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주인공 세 사람의 개성이 잘 드러나서 재미있었다. 특히 슈뢰딩거가 성탄절을 앞두고 찾아간 빌라 헤어비히 요양원에서 겪는 원장의 딸 헤어비히 양과의 일화들이나 일방적으로 그에게 품는 욕망과 좌절과 자기혐오 같은 것들에 대한 묘사는, 넌픽션이 상당하겠지만 역사적 인물로 박제된 사람의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양자역학도 파동함수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들어만 봤을 뿐인 단어들이고 최대한 쉽게 기술했겠지만 이렇게 한 번 읽는 것으로 내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라 아쉬웠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술집에서 만나 위협을 받은 사내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어마어마한 지옥이 당신 탓이 아니라면, 당신 같은 사람들 탓이라면 누구 탓이겠습니까? 말해봐요, 교수 양반. 이 모든 광기는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라는 거친 말이 관통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불확정성과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와 과학과 인류의 결정이 만든 지옥의 현실을 살짝 곱씹어볼 수는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단세포같은 결론을 위해 쓰여진 작품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함께.
"밤의 정원사"는 열 장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소설답게 읽혔고, 앞서 나왔던 많은 복잡한 이야기들을 한 궤로 아우르는 풍부한 은유를 담은 작품이라고 느꼈다. 식물 역병으로 죽어가는 나무들을 돌보는 밤의 정원사, 그는 할머니가 늘 좋아했고 돌보았던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자란 후에 들었다. 밤의 정원사를 만난 '나'는 유럽인 이민자들이 건설한 마을에 퇴역 육군 중위가 지은 집을 사들였고, 어린 딸과 산책하며 매년 한두 마리씩 아마도 청산가리에 중독되어 죽은 개를 발견한다. 범인을 짐작하지만 확증할 수 없고 그 죽음은 계속 이어지지만 주목되지 않는다. 수학자이고 알코올중독자인 밤의 정원사는 프리츠 하버와 그로텐디크에 대해, 양자역학에 대해 말하지만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252쪽)고도 말한다. 작가가 전하는 밤의 정원사의 마지막 말은 레몬나무가 죽는 이유다. 갖은 위험에서 살아남은 나무의 말년에는 무수한 레몬이 달려 한꺼번에 익고 그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지는 "죽음을 앞둔 풍요"(254쪽).
역사적 사건에 가려졌던 다양한 이야기들과 함께 인류가 만든 진보와 그의 그늘을 꼼꼼히 탐색하는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에 담긴 위대한 과학사적 발견과 이론 같은 것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과학자들도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니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면 한심한 독후감이겠지만 사실이고. 뒤로 갈수록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다는데, 그럼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수학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싶어졌고 그의 극단적이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서는 더 읽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들끓으면서도 그 상태가 평시성이 되어버린 듯한 오늘의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금이 바로 레몬 풍년의 시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벵하민 라바투트•노승영 옮김
2022.5.25초판인쇄 6.7초판발행, (주)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