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푸르스트가 젊은 시절 펴낸 작품집 [쾌락과 나날]의 소설 중 네 편을 추려 당시 수록 순서와 똑같이 실은 단편집이다.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과 별장을 드나들던 이십 대 중반의 작가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패러디한 제목을 붙여 고가의 호화 장정본의 작품집으로 출간했고, 당시엔 대다수 독자의 외면을 받았다고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책에는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과 마지막 "질투의 끝"은 남성이 주인공이고 사랑과 욕망, 삶과 죽음이 주요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이었고, 중간에 차례로 실린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과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유년 시절의 순수함과 세속적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대비시키고 쾌락의 공허함을 성찰하는 내용이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의 주인공은 이른 나이에 죽을 병에 걸린 자작 발다사르,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조카 알렉시가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 갈등과 혼란에 휩싸인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점을 오가며 드러나는 알렉시와 발다사르의 내면 묘사가 인상적이다. 만개한 젊음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알렉시가 다음 해 생일에 느끼는 전년과는 판이한 감정, 기복을 오가며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의식하던 발다사르가 극적인 쾌유의 소식을 들은 후 느끼는 죽음에의 향수 같은 것들. 이십 대 초반에 쓴 첫 소설에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입체적으로 탐구하며 당사자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은 시골에서 명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비올랑트가 사교계에서 모두를 사로잡으며 성공한 후 음악과 사색, 고독, 들녘 같은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잃은 채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다. 욕망과 쾌락이 지배하는 화려한 세계에 익숙해진 비올랑트가 한편으로 권태와 허무를 느끼며 남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시점이 언제나 '모레'라는 것, 작가는 이를 결국 '습관의 힘'으로 규정하는데 배경과 달리 현대적으로 느껴지던 소설이 갑자기 교훈적으로 마무리되어 신기했다.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부모에게는 정숙한 딸이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젊은 여성의 회고다. 자살할 결심으로 총구를 당겼지만 빗맞아 삶의 시간이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아가씨'는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고백한다. 어머니의 권유로 결혼을 약속했지만 약혼자가 없는 파티에서 다른 남자와 무절제하게 쾌락을 탐하다가 그 순간을 목격한 어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지자, 목숨을 끊기로 했고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서정적인 묘사에 이어지는 과거의 타락, 내면의 가책과 갈등, 영혼의 소생과 환희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기 못했기만을 바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혼란 등이 속도감 있는 스릴러처럼 읽혔다.
"질투의 끝"은 미망인인 손느 부인, 프랑수아즈를 사랑하는 오노레의 이야기다. 오노레는 쉽게 사랑이 식는 편이었지만 프랑수아즈를 향한 마음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극해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증거도 없는 뷔브르의 말 한 마디에 시작된 의심은 곧 불안과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고 강박으로 자리잡는다. 시간이 흘러도, 마차의 말에 채여 다리가 부러지고 죽음이 임박해도, 오노레의 마음속에는 프랑수아즈에 대한 집요한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노레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짧은 분량임에도 작품마다 장이 나뉘어 있고 시작 부분에 문학 작품에서 인용한 짧은 문구나 제목이 붙어 있어, 해당 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보들레르처럼 이름을 들어본 작가도 있지만 세비네 부인처럼 처음 들어본 경우도 많았는데, 인용 문구의 출처와 간략한 해설이 19세기 이전 프랑스 문학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푸르스트의 문장이라기보다 번역자의 문장이지만, 어차피 원문을 읽을 수 없을 테고) 감정을 이입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맥락 없이 공감되는 문장이 종종 있어서, 문학이 담아내는 인간의 보편성이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얇은 책이지만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읽기 전부터 거리감이 있었는데, 서두에 실린 박상영 작가의 추천사가 적절하게 부담을 덜어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잘 알려져 있는 작중 인물이 마들렌을 베어 물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설정이나 즐겨 사용했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심리 묘사가 사용된 작품들이어서 초기작에서부터 드러난 작가 특유의 개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가장 긴 분량의 책은 [티보가의 사람들]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보다 30% 정도는 더 길다고 하니 읽기에 도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저 멀리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듯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을 아주 살짝 맛본 느낌이다.
마르셀 푸르스트•윤진 옮김
2022.4.29초판1쇄찍음 5.6펴냄, (주)민음사 쏜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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