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또 눈이 왔나 보다. 일찍 귀가하라며 걱정하는 엄마의 카톡이 왔고 마음이 불편해서 안 열어 보고 있었더니 저녁에 전화가 왔는데 받을까 말까 갈등하는 사이 끊겼다. 얼마 후 마음이 쓰여서 전화했더니 안 받고, 조금 후에 씻었다며며 연락이 왔다.
집에 왔냐? .. 응.
내일 출근해야 되냐, 안 해도 되냐? .. 으으응.
출근 안 해도 되냐? .. 뭐, 안 해도 되고...
짤렸냐? .. 응.
농담이지? 진짜로? .. 응, 뭐.
너네는 잘리고 그런 거 없다며? .. 다 어려운데 그럴 수도 있지.
니가 그만두고 그런 거면 안 되는 건데. .. 뭐, 그렇게 됐어.
그럼 요즘 일 구하고 그러냐? .. 아니, 이십 년 일했는데 좀 쉴라고.
아빠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 전화할 일도 없는데 뭐, 설에 얘기해.
다음 주에 다 얘기할 텐데 거짓말하기도 애매해서 얼버무리다 보니 눈치가 이상했는지 엄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고, 당황도 했고 둘러대는 것도 찔려서 수긍하다 보니 얼떨결에 나의 실업상태가 밝혀졌다. 의외로 엄마는 침착했고, 기분탓일 수도 있지만 약간 나를 연민(?)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짧은 통화 후 엄마의 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통영으로 이사한 것만 까면 된다. 좀 홀가분해진 기념으로 사촌한테 전화해 엄마랑 통화한 얘기를 했다. 감추고 있던 것 중 하나를 얼결이지만 엄마한테 얘기한 것도 좋았는데, 오랜만에 사촌한테 전화해 수다를 떠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예전에 읽은 사노 요코 에세이에는 친구나 이웃이랑 전화하는 대목이 많이 나왔다. 절친과는 거의 매일 전화로 수다를 떤다고도 해서, 나이를 먹으면 그런 건가 생각했었다. 젊었을 때도 용건 없는 전화는 안 하는 편이었고,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지인들이라야 대부분 일하며 만난 이들이어서 일상적으로 누군가와 통화할 일은 거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전화를 걸어오는 통영산 지인이 유일한 예외인데, 몇 년째 이어지는 안부 연락이 무척 고마운 일이라는 걸 최근에야 느끼고 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 혼자 있자니 가끔은 누군가와 전화로라도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는데... 먼저 전화하면 불편해하지 않고 받아줄 만한 지인이 한 명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잘 안 하던 연락을 일 그만두고 혼자 타지에 있다고 갑자기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라 삼가게 된다. 사노 요코 할머니의 일상적인 통화는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되는 소통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오래 이어온 관계 때문에 가능한 거였겠구나 새삼 느낀다.
어제 헹굴 때 식초를 넣어 빨았던 수건으로 샤워 후에 물기를 닦았다. 먼지가 아예 안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바디로션에 먼지 찌꺼기가 뭉쳐지는 일은 사라졌다. 이것도 오늘의 기분 좋은 일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