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2:25


세상을 다 잡아먹을 듯한 소란도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 가끔 세상은 정도 이상으로 흥분하고, 이상하리만치 금세 그 소리들이 잦아들곤 한다. 고 이은주와의 사랑 운운으로 온 포탈사이트가 시끌벅적했던 게 언제였나. 전인권 아저씨의 책이 나왔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조용히. 가끔은 냄비세상의 좋은 점도 있다. 너무 소란하게 나올 필요는 없는 책이니까.  '인권이 라이프' 이후로 그는, 더이상 한때(혹은 여전히) 한국록의 전설이었던 '들국화'의 보컬로 소개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들국화의 전성기는 90년대 이전에 이미 지나갔으니 당연한 것일런지 모르지만, 왕성한 활동기를 갓 지났을 때 그들의 존재를 알고 들국화의 음악에 외로이 열광했던 중학생이었던 내게 전인권이라는 소리꾼은 미디어에 의해 급부상한(?) 독특한 아우라의 대중문화 아이콘은 분명 아니다.
 

전인권이라는 개인에게 특별히 열광했던 적은 없지만, 나는 동아기획의 양대산맥 김현식-들국화가 있던 그 시절의 음악에 영혼의 빚을 톡톡히 지고 있는 사람이다. 노래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졌거나 비뚤어진 인간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사람보다 노래에 더 마음을 의지했던 나의 성장기에 특히나 동아기획은 대략 절반 가량의 자양공급원이었다. 그리고 들국화 1집, 2집, 라이브, 추억들국화 ... '우리'가 실렸던 들국화 3집, 전인권의 개인 음반, 삼청동 초입에 있었던 전인권까페, 아저씨와 전인권, 미사리의 전인권 까페 등은 개인적으로 내게 각인된, 소중한 에피소드다.
 

이 책에는 1972년부터 2005년 지금,까지의 전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노래에 관심없는 기성세대들이 그를 기억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마도 대마초가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 그답게 이 책의 본문은 '환각의 정체'로 시작된다. 그리고 삼청동 산자락에서 태어나 자라며 산의 버찌와 온갖 나무 열매들로 배를 채우던 어린 시절, 춘길이 형님을 필두로 한 동네의 지인들과 함께 삼청공원을 주무대로 삼아 노래를 연습하고 꿈꾸던 청년 시절의 이야기. 가난하고 지리멸렬했지만 꿈이 있었던 낭만적인 시절의 명동과 종로, 신촌, 흡사 강호의 고수들처럼 외로이 자신의 음악을 연마하던 이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고 서로를 알아보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글에서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한이 아닌 현재를 사랑하는 자의 과거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 한껏 느껴진다.
 

연배만이 아니라 활동과 역량으로도 그는 이미 기인의 풍모를 가진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지만, 스스로 회고하는 젊은 날의 모습에는 제대로 된 '소리꾼'이 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가 잘 나타나있다. 지금의 그를 보면, 전인권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타고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무대에 선 다른 뮤지션들을 보고 주눅들어 하는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이나 노래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고달프게 떠돌던 모습들은 그가 얼마나 꾸준히 노력해왔는지를 잘 느끼게 해준다. 비루하다고 느껴질 만큼 곤궁하고 보잘 것 없었던 젊은 날의 그, 하지만 스스로를 '행운의 사나이'라 칭할 만큼 낙관적이고 운명적으로 자신을 믿었던 그의 모습은, 그리고 나이답지 않게 너무나 천진하게 자랑도 하고 유치함을 드러내는 모습은, 전인권이라는 인간에게 최소한 위선과 가식은 없으리라는 개인적인 믿음을 더 두텁게 해준다. 어쩐지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어진다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우리'라는 노래가 나올 때부터, 그가 지향하는 것이 어떤 단순함과 명료함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쉬운 가사들의 반복, 허전하리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멜로디, 겸손하고 막힘없이 속에서부터 끌어내지르는 목소리, 솔직히 말하면 말로는 다 설명이 안되는 전인권스러운 많은 것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정말로 단순하고자 하는 것 같다.(생각해보니 이미 그는 '단순하게'라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투명한 것일수록 긴 설명이 필요없듯이, 그는 세상의 이해를 받기 위해 전전긍긍 사설을 붙이지 않는다. 조금은 엉뚱하고 일반적이지 않을지라도,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식으로 성장해왔고 이제 그 세계에 대해 적잖은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더욱 따뜻해졌던 것은, 그가 자신이 마주쳤거나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애정과 정직한 동료애였다. 책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김민기, 이장희, 한대수, 유현상, 엄인호, 들국화의 전 멤버들(특히 몇 년 전 타국에서의 사고로 저 세상으로 간 고 허성욱님에 대해서는, '잘 있냐'로 시작하는 담담하지만 눈물 나는 편지를 따로 싣고 있다.) 등. 그리고 그가 살아오면서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명 혹은 가명으로 언급되는데, 뭐랄까. 책 속에 빠져 읽다보니 전인권의 친구들 모두가 잘 되는(?) 날이 꼭 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다른 개성과 초야에 묻은 실력과 어떤 자존심 혹은 어떤 비운 등으로 세상에서 빛나지 못했지만, 뮤지션 전인권의 상찬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 그리고 내게는 특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그리고 그에 대한 진심어린 인정과 깍듯한 예우, 정말 멋졌다.
 

사실 읽는 입장에서 보면 책이 조금 맥락없이(?)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자유롭게 내뱉는 독백 형식의 구어체에서 한번씩은 생뚱맞은 대화체가 튀어나오기도 해서 잠깐씩은 아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낯설음에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참 전인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상당히 공들여 편집되었다는 느낌이다. 말미에 덧붙인 컬러 화보도 그렇고, 중간중간 간지처럼 들어간 모노톤의 사진들과 그의 시(?), 노래 가사들. 정성껏 만들어진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 좋다. 지나친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들국화와 전인권의 노래는 그렇다치고 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노래들은 씨디로 함께 담아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노래연습에 골몰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에, 꽤 많은 노래들이 언급되는데 모르는 노래들이 대다수고 궁금하기도 하다.
 

뮤지션 전인권. 엄청난 마이너리티와 엄청난 샤우팅, 이 두가지 외에 사실 내가 그에 대해 실제로 아는 건 거의 없지만, 그의 책을 열심히 읽고 그래도 그의 노래를 이십년 가까이 관심 있게 들어온 리스너의 입장에서 작은 바람이 있다. '인권이 라이프' 이후의 그, 자의건 타의건 미디어에 의해 복제되고 유포되는 엉뚱하고 자유로운 사자머리 뮤지션 전인권의 이미지와 그 가벼운 매커니즘이 더 이상 인생을 건 그의 노래와 마이너리티를 훼손(?)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 음, 아무려나... 일단은 전인권 화이팅,이다.


2005-08-07 04:39, 알라딘



전인권걱정말아요그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자전적에세이
지은이 전인권 (청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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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