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23. 23:26

 

종일 먹구름이 가득했는데 신기하게 비는 안 왔다. 이런저런 지인들이 등장하는 어수선한 꿈을 꿨는데, 깨어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지금은 누가 나왔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가끔 궁금은 하다. 어떤 날은 꾸고 어떤 날은 꾸지 않고, 많이 생각하면 아주 가끔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던... 이건 아주 예전의 일이네.

 

어젠지 오늘인지도 헷갈리는데, 포털사이트에서 기사들을 보다가 정말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는 벌써 일주일쯤 전의 일이었는데, 오랜 팬이었던 이가 자신을 사칭하거나 혹은 자신을 이슈로 해서 채팅방을 만들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그게 도를 넘어 이야기를 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도 sns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뭐 그런. 언론이라고 생각지 않는 주류언론사의 기사였고, 기사 말미에는 짧지 않은 그의 2차에 걸친 입장문 전문이 실려 있었다. 한 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씁쓸하고 그에게 열광하고 내 일생에 사랑이란 게 있다면 오직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마음이 언뜻 떠올랐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고,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도 처분하지는 못했던 그에 관한 여러 자료들(언젠가 때가 되면 그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았다.)에도 생각이 미쳤다. 젊은 날 고통과 슬픔을 유머로 또 절규하는 노래로 바꾸어내며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의 매혹적인 존재감과 아우라는 대단했었다. 인기를 얻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아마도 과신하면서) 또다른 일들에 홀로 뛰어들고 좌충우돌하고 실패하고 가라앉고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이십여 년 사이, 그는 늙었다. 물론 나도 늙었고 누구나 늙는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왜 그렇게 커져야 했을까, 아주 가끔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커졌다가 상처 입고 작아지는 반복 속에서 세상이 쉽게 말하는 존재가 되고, 자신에게는 트라우마인 일들이 타인에게는 가십이 되고, 커다란 무관심과 작은 열광 사이의 혼돈에서 스스로를 잃어가는 슬픈 일이 그의 탓만은 아닐 거라고도 생각한다. 한참 전처럼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를 좋아했던 시간들이 내게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만, 내가 보았던 시절의 그 모습이 어떤 본령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는 그가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다른 모습이더라도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의 산책은 오랜만에 통영해양관광공원을 향했다. 먹구름과 바람이 많은 날이었지만 바다는 시원했다. 통영대교의 조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물에 비친 모습은 꽤 운치가 있다. 한참 걷는 중에 1월에 오겠다 했던 지인에게, 설 이후에나 가능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여러 일들을 정리하고 집에 와 온전히 홀로 생활한 게 이제 한달쯤 되어간다. 짧기도 길기도 한 시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계속될 시간이다. 1월 초에는 집 정리를 마무리한다며 지름신과 타협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지인들의 이부자리까지 몇 세트나 새로 샀고 얼마 전까지 정리와 세탁에 열심이었다. 불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나를 위한 일이었고 헛헛한 마음에 뭔가 자꾸 사들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리가 끝나고 '정말 생활'이 시작된 지는 열흘이나 됐을까 싶은데, 실은 극도의 고독감을 자주 느낀다. 그럼에도 별로 힘들지 않은 이유는 조금만 움직이면 만날 수 있는 바다와 운하, 서울과는 다른 공기, 다르게 느껴지는 햇살 같은 것들의 힘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생활을 힘들어한다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을 뜨겠다고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한동안, 언젠가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겸하는 작은 공간을 꼭 마련하겠다고 계획했었다. 서른 이후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경험했던 숙소들을 떠올리며 막연히 생각한 것이었고, 삼십대 이상 홀로 여행하는 여성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1-2인실 두세 개 정도의 규모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고(좋아하는 대부분이 고인이다.), 생활의 접촉면이 넓은 숙박 같은 건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살다 보면 다르게 느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한참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에피소드를 좋아했고 공감도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온전히 혼자의 생활 속에서 흔쾌함을 느끼며 살아가려고 한다. 산책과 (초등학생 일기 같은 이런 거라도) 쓰기는 그런 생활을 만들어가는 훈련 중 하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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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