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시작해서 11월 말까지는 죽어도(?) 논문을 써서 제출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의지로 승화하겠답시고 읽었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책장에 있어 신기하다 했는데, 나름 나홀로 기념 좋아하는 데다 그 기념 안하고 넘어가면 또 마냥 유예하는 게 버릇인 터라 반갑기도. 사실 제목에 '잘'자만 빠졌으면 좀 더 부담이 없었을텐데, 암튼 저작의 시점과 지금의 여러 조건 환경 차이가 보통이 아닐텐데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나의 경우이지만, 논문을 발등에 떨어진 불로 여기기 전까지 나는 소위 방법론의 문제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물론 시작이고, 그 시작이 반이겠지만 적절한 연구 방법에 대한 고민은 무척이나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여 작업의 과정이나 연구 진행 방법 혹은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는 대략 적당한 걸 찾으면 되겠거니 하는 정도였다. 물론 내 경우 전문연구자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학업을 정리하는 과정으로 도전해보는 셈이니 그렇다고 자위했지만, 읽고 나니 다시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자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적잖이 현학적이거나 고루 혹은 지루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실용서를 표방하는 책의 제목에 걸맞게 무척 친절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고 연륜과 배려가 묻어나는 적절한 팁도 적지 않은 데다 군데군데 정말 웃기기까지 해서 지겨울 겨를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만약 카라바지오에 대한 논문을 쓴다면, 여러분은 그림을 그릴 것인가? 라니...!! 게다가 때로 놀라울 정도로 실감나게 초심자의 비현실적인 욕망을 지적해주시니 이거 내 얘기군 싶어 민망하기도 하고, 대가의 통찰이란 초발심을 잊지 않는 것인가 혹은 무지막지하게 천재적인 기억력인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테마의 선택이나 자료 조사 방법, 작업 계획 그리고 원고쓰기 등 실제적이고 방법론적인 조언들과 더불어 학문적 겸손과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논문에 대해 내린 결론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말하는 학문적 겸손은 어쩌면 매우 당연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참 쉽지 않은, 특히 나처럼 별 아는 것도 없이 편협한 소갈딱지에다 다른 주장하는 자를 적 삼고 극단적인 주장하기를 일삼는 무리에게는 새겨들어야 할 고언이다 싶었다. 또 그가 말하는 학문적 자부심에서 나는 괜스레 의지가 솟고 마음이 들뜨기도 했는데, 여러분은 그 주어진 테마에 대해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인류의 기능인이다. 입을 열기 전에는 겸손하고 신중하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입을 열었을 때에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라. 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어쨌거나 써야한다'는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다시 준비를 시작하며 나는 괜스레 급해져 좀은 위축되기도 했고 논문을 욕망하던 마음의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어 고민스러웠다. '다문화' 바람의 뒷전으로 밀려 언젠가부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민에 대해, 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자 목소리를 빼앗겨버린 그들의 존재에 대해 자꾸만 이야기하겠다는 거친 당위가 실은 진심을 가장한 손쉬운 안주는 아니었을까 반성도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실제적인 준비 없이 오로지 마음과 머리로만 산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혼란이라는 생각이었다.
전에 논문연구 수업을 들을 때, 내가 좋아하는 어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논문을 자신의 실존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들으면서는 웃기면서도 뜨끔했었는데. 어쩌면 짧지 않은 책 속에 카드 정리 방법이며 참고 문헌, 인용문 기록 방법까지 까탈스런 노인처럼 구구절절 읊어놓은 저자가 내린 가볍고 유쾌한 결론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즐거움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일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라는 뭐 그런 말씀.
꼬박 1년 6개월 동안 손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니 괜스레 어디 아픈 것도 같고 몸이 들쑤시기도 해서, 급작스런 전환보다 적절한 예열을~ 이라며 주섬주섬 보낸 시간이 벌써 보름이다. 나름 배수진 친답시고 소문 낼 만한 데는 다 냈고 이제 상황은 쪽팔림이냐 논문이냐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제출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할 일, 졸업하고 나서 다음 학기에 할 일까지 미리 생각해놨으니 이제 주변 정리한답시고 딴 짓 할 꺼리도 없고, 기왕 하기로 한 거 즐겁게. 실은 고작 자기확인 내지 자기만족을 위한 작업이 되겠으나, 가능하다면 공동체에 완전 무익하지는 않은 방향으로, 그렇게 잘 끝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2008-04-14 02:06,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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