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11


'한눈에 보는'과 비슷한 수식이 붙은 제목의 책은 사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아는 건 없어도 어쩐지 너무 주마간산 겉핥기일 거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도 하고, 제목에서부터 떡하니 선언하는 만큼 실제로 깊이 없는 사실의 나열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기도 한 까닭이다. 하지만,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면 오히려 다이제스트 형식의 구성이 미답지에 대한 입문서로는 적당할 때도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발간은 2004년이지만 본문의 내용은 대체로 2002년쯤에서 정리되고 있으니, 벌써 5년이나 지난 시점의 기술이라는 게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내가 너무 늦게 읽은 탓이니 뭐랄 수도 없다.
 

책은 중동과 서아시아+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의 여섯 지역으로 크게 나누어 세계 각국의 분쟁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유치한 삽화로 장식된 표지에 걸맞게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되기도 한 모양인데, 표지뿐 아니라 본문의 구성 역시 기초 학습에 적당한 참고서 형식을 취한다. 한 절이 시작되는 첫 머리에는 그 지역 분쟁의 '포인트'가 한 줄의 헤드라인으로 그리고 주요사건의 경과가 연대순의 도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분쟁 지역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단순한 지도와 몇 문단을 묶은 소제목들만으로도 상황이 개괄될 만큼 일목요연한 설명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들어간 박스에는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각종 팁들이 정리되어 있고, 챕터마다 말미쯤 붙은 칼럼에서는 그 지역의 이슈 중 논평할 만한 주제 하나를 매우 압축적으로 다룬다. 너무 도식화된 구성에 간략한 서술이라는 생각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지만, 그야말로 초심자의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신경을 쓴 흔적은 역력하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진행중인
 분쟁의 메커니즘을 가능한 알기 쉽게 서명하고자 노력했다. 몇 세기에 걸친 역사를 제한된 지면에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매일 홍수처럼 흘러 들어오는 국제 뉴스를 설명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말처럼 정말 욕심이나 겉멋 같은 건 싹 치우고 애초에 잡은 목표대로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에 매우 충실한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소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아쉬운 의구심 하나는, 쿠르드족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언급한 할라브자 마을의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것이었는데, 책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이라크의 소행으로 단정 짓고 박스 기사로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은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110-111p)에 의하면 내외에 이라크의 자국민 몰살로 알려져 갖은 규탄의 빌미가 되었던 그 비극은, 2003년 전 CIA 고위인사의 기고와 기밀 보고서에 의해 이란의 소행이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안 그래도 어쩐지 불쌍한 이라크와 이제 고인이 된 후세인을 생각하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은 작은 판형 얄팍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무려 스무 곳 가량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전에 읽은 다른 책들에서 다루지 않았던 터키와 그리스가 얽힌 키프로스, 중국의 자치주이며 망명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티베트, 일본과 러시아 간의 북방 영토 문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북아일랜드, 러시아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체첸, 식민통치가 갈가리 찢어놓은 르완다, 독립과 자치를 놓고 3세기째 공방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와 스페인, 반정부 무장세력과 일본계 대통령의 정부 간 갈등이 고조된 페루 등의 이야기가 새로웠다. 물론 무척 가벼운(?) 터치로 현상 위주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궁금한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구해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남북한 문제, 비원의 남북통일은 실현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분쟁에 속해있는 한국의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글들은 모두 한국의 저자가 세계의 분쟁 현장에 대해 쓴 것들이었고, 참담한 전화와 파괴가 현재진행형인 그 지역들에 눈을 박으며 분개하면서 단 한 번도 우리나라와 결부지어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바로 어제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은 대통령의 이야기에 온 매스컴이 들썩였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짱짱한 휴전선이 여전히 남북을 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분쟁당사국의 국민으로서 이렇게나 불감어린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게 실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민족주의와 종교갈등 무엇보다 패권의 유린으로 비참한 분쟁에 휘말린 그 땅들을 조금은 내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매우 압축적이고 도식적으로 분쟁의 기원과 경과, 현상황 등을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나마 분쟁 지역민들의 고통과 신음에 닭살이 돋거나 한숨이 나오는 독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건조한 기술로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유럽의 식민지 경쟁과 제국의 패권주의가 야기한 불평등하고 참혹한 지구사회의 현재였다. 북미와 중부 유럽을 제외한 지구 내 거의 모든 지역이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극렬하거나 만성적인 분쟁에 휩싸여있으며, 옮긴이의 말마따나 
분쟁은 지금의 세계 질서를 지탱하는 불가결한 조건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나도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옮긴이는 그렇다면 지금 세계 여러 지역의 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갖는 것은 지적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자 윤리의 문제이다. 전쟁과 학살과 폭력에 반대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바로 그 전쟁과 학살과 폭력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라고도 덧붙이고 있다.

솔직히 상식이자 윤리의 수준으로 국제 분쟁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에 외면적으로 평화로운 우리들의 삶 역시, 세계를 추동하는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작동 방식과 연대를 가로막는 팍팍한 조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반공과 용공으로 나뉘어 단 하나의 전선 아래 숨죽였던 시대의 기억은 가물해진 지 이미 오래, 무제한의 자유가 철철 흘러 넘치고 있다고 오해되는 세상에서 구가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유가 혹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고 함께 가난해질 자유는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만 해도 골치부터 아파오는 국경 너머의 이야기들에 조심스레 관심이 생겨난다면, 그 첫 번째 책으로 꽤 마땅하다 싶기도 하고. 지은이의 국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서술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원저와 역서의 출간 사이 변화된 국면을 채워 넣은 옮긴이의 노력과 성의도 느껴지는 고마운 책이다.


2007-10-03 22:47, 알라딘



세계분쟁지도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일반 > 청소년정치사회
지은이 마스다 다카유키 (해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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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