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비분쟁 지역의 개인이 국제 분쟁과 관계를 맺게 되는 방식에 대해, 물음이 떠올랐다. 어떤 배경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냐에 따라 공감부터 무관심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이 있을 것이고, 적극적인 관심에서 뻗어나간 후원과 연대 활동 마침내는 현장으로의 투신까지 갖가지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누구나 쉽사리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다보면 국외와 해외가 동의어인 우리에게도 그 땅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던 심정적 거리가 어쩌면 공감과 지지의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겠지만, 분쟁 보도나 관련 글을 접하다보면 전하는 이는 대체로 전문인으로서의 안정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기자이건 활동가이건 현장과 나 사이에 분쟁 메신저로서의 공식화된 자격을 획득한 후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새삼스레 분쟁과 어떤 개인 혹은 나 사이에 작용하는 미묘한 변화 지점 같은 걸 인식할 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색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새삼 감식하고 또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분쟁이 연상시키는 칙칙한 이미지를 걱정한 것일까. 제목도 표지도 산뜻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문체도 어쩐지 필사적이고 우울했던 정문태 기자의 글에 비하면 구어체에 가깝게 경쾌하고 가벼운 필치다. 도입부의 결심과 결행 과정부터 시작해 본인의 고백이 꽤 많은 탓에 어느 부분에서는 분쟁 지역 여행자의 일기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프롤로그와 첫 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지은이는 아시아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반도에 폭 파묻혀 획일화된 우리네 삶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을 세계에 대한 시선 돌리기와 직접 체험으로 바꿔보자고 꽤나 당부한다.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누구나 감행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닐 터다. 하지만 그녀의 선동이 고맙기는 하다.
삼십 년을 한국에서 살아온 지은이가 어쩌면 꽤나 무대책에 무일푼으로, 세계를 떠돌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두 가지의 자극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타전하는 현장의 박진감 넘치는 기사들과 한 달 간의 유럽 배낭여행. G(Gypsy)형 피를 가진 인간이면 된다는 정문태 기자의 운명론에다, 속에서 용솟음치는 역마살과 유럽을 떠돌며 느꼈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만 9년 동안 언론운동 활동가로 살아왔던 경험을 밑천 삼아 그녀는 과감히 분쟁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길을 나선다.
자발적 가난과 유목의 삶을 선택한 지은이는 낯선 호주 땅에서 이주 노동자로 반 년쯤을 살면서 마음속에 품은 분쟁 취재의 꿈을 현실화할 계획을 세운다. 시드니의 운동판을 기웃거리고 난민 커뮤니티의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아시아에 새롭게 눈 뜨고 국제뉴스로 접하는 미처 몰랐던 세상의 내밀한 소리들을 심장에 차곡차곡 담는다. 그녀는 타지에서 자국 문제를 알리고 국제 연대를 호소하는 난민들과 교류하면서 출신국의 고유한 문화와 의식을 담지한 그들의 잠재력을 절감하고, 그러한 소통과 존중이 정체된 의식의 환기와 새로운 삶의 구성에 풍부한 자양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분쟁 취재길에 오른다.
그녀는 용감하고도 무모했다. 그리고 무모한 만큼 거침없이 나아간다. 스스로 고백하는 막막함과 시행착오 만큼이나, 초반부는 사실 분쟁 취재에 출사표를 던진 한 젊은이의 좌충우돌 체험기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처음 분쟁의 땅에 당도한 그녀의 모습은 낯선 세계의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과 순수로 가득찬 아마추어 같기도 하다. 그러나 타이-버마 국경 지대로부터 군부독재의 압제와 극심한 빈곤에도 고요히 숨죽인 버마 내부를, 성자의 나라에서 IT 강국으로 약진 중인 인도의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이면을, 타밀족에 대한 오랜 차별과 극심한 부패로 평화를 떠나보내는 스리랑카를, 히말라야 골짜기를 붉게 물들인 네팔 마오이스트와 절대왕정에 저항한 민중항쟁을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점령 로맨스'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카슈미르를 가로지르며 현실을 생생히 전하는 동안 그녀는 변화하고 있었다.
국제분쟁과 관련한 일반론이나 지난하고도 복잡한 세계 정세와 배경 같은 것들은 대체로 생략되고, 지은이는 자기가 관심하고 추적한 것들을 소상히 서술한다. 리포트라기보다 에세이같기도 한 글들은 철저히 지은이의 성향과 지향을 따르고 있는데, 해서 자신이 좀 '빨갛고 삐딱한'(!) 인간이라 느껴온 독자라면 매우 흔쾌한 마음으로 눈을 빛내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민족, 점령과 교전, 협상과 평화와 같은 분쟁의 보편 언어와 함께 그녀가 더욱 주목하며 집요히 좇는 또 다른 코드는 이를테면 차별, 저항, 좌파, 반군, 혁명, 해방 같은 것들이다. 더불어 그녀는 언론운동 활동가로서의 문제의식을 현장에서도 예민하게 발휘하며 현지 언론에 대한 비판적 관심과 패악의 고발도 잊지 않는다.
그녀가 누빈 땅 역시 대부분 이미 분쟁으로 유명세를 얻은 곳들이지만 기존의 관련서들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경과를 따라잡는 데에 치중했다면, 이 책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관심 편향에 따른 특정 이슈에 대해 현재적 관점의 밀도 있는 심층 취재에 주력한다. 주로 저항 세력 내부의 동향 타진과 밀착 취재를 통해 미디어에 의해 호도되고 왜곡된 사실을 밝히는 것과 분쟁의 핵심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자면서도 늘 소외되어 왔던 지역 민중들의 휘발된 신음을 되살려 고통스런 진실을 호소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리버럴 좌파'쯤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사상의 거처를 찾는 순례자를 자임하지는 않는 까닭에, 지은이가 마주하는 분쟁 지역에서는 '좌회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만큼 심란하고 실망스러운 작태를 보이는 좌파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기대하고 궁금했던 부분은 네팔의 상황이었는데, 주변 네팔분들에게 간헐적으로 얻어들어온 마오이스트들의 이야기와 왕정이 무너지고 선거를 하네마네 급박하게 돌아가는 요즘 상황이 어디서 어떻게 발원한 것인지 속 시원히 알려주는 책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 년에 이르는 네팔 내전에 대한 책 한 권을 만날 수 없었고, 네팔 여행기 같은 데에서 마오이스트 활동의 파장이 가끔 언급이 되기는 했지만 당연히 단편적이고 주변화된 서술에 그쳤다. 지은이는 2006년 4월 정점에 이른 소위 '네팔 제2의 민중항쟁'을 시종 지켜보고, 그 원동력이 된 마오이스트들의 본거지 히말라야 계곡을 찾아 그들을 밀착 취재한다. 물론 무장항쟁의 빛과 그늘이 존재하겠지만, 그녀가 확인한 그들의 실체는 기대를 가져도 괜찮은 것이었던 것 같다. 격렬하고 거침없는 피플파워와의 상승효과로, 이 책에서 네팔은 유일하게 활기와 희망을 담은 현장인 듯 싶기도 했다.
2004년부터 분쟁 현장을 누비면서 도둑 맞아 가진 것을 모두 털리거나 하는 긴급 상황에 봉착하면 그녀는 잠시 한국에 들렀다 가는 모양이다. 지난 5월에 쓰여진 프롤로그의 말미는 '봄날'을 애타게 부르는 땅, 카불에서 이유경 이라고 적혀있다.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어느 새 삼십 년간 살아왔던 한국에서 폭 젖어 있던 많은 것들을 낯설고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르게 존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라고 딸에게 말하는 영화 '초콜릿'의 한 대목을 에필로그에서 인용하는 그녀가 소망하는 것은, 서로 다름이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도무지 해결날 것 같지 않은 골 깊은 갈등과 분쟁도 따지고 보면 서로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시작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아마 지금도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추레하고 볼 품 없는 모양새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소망하는 세상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을 그녀에게, 관심과 응원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분쟁 관련 서적 편집의 클리셰를 벗어나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는 지도가 단 한 장도 나와 있지 않다. 물론 성의를 들이면 인터넷이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지역 지도 없이 지은이가 발 딛는 그 많은 곳들의 위치를 상상할 수 있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책의 내용이 도식적이고 고착된 분쟁 분석이 아닌 진행형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따라가는 서술에 주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소한 지은이의 행로를 일별할 수 있는 정도의 지도는 덧붙여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2007-10-05 03:2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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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이라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옮긴다, 내가 틀린 거면..;;;
6p 열어 재낀 -> 열어 젖힌
10p 환전은 불랙마켓에서 -> 블랙 마켓에서 (69p의 제목 나열에서도 마찬가지)
26p 특히 몸과 매무새에 문제로 -> 매무새의
92p 운전수 창밖을 -> 운전수가 창밖을
97p 첫 2주 동안은 거의 방안에만 거의 쓰러져 있었다. -> 거의 방안에만 쓰러져 있었다.
150p 400~500명이 폭도들이 달려들어 -> 400~500명의 폭도들이
174p 타산지석으로도 삶는 -> 타산지석으로도 삼는
185p 또 스시랑카 정부가 -> 스리랑카
179p 섬은 그렇게 인재와 자연재해의 '윤간'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 이건 오자는 아니고 개인적인 느낌인데 너무 불편했어서... 사실 관계의 설명이 아닌데 단지 비유적 표현으로 굳이 '윤간'이라는 단어 선택을 해야했을까 싶다. 더구나 타이-버마전선 꼭지에서 전쟁과 내전에서 전략으로 선택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언급하고 분노했던 게 생각나서 더욱 아연하고 불편했다.
185p 또 스시랑카 정부가 -> 스리랑카
384p 빨간 구도 신어? ->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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