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18. 22:55

 

바람이 많이 불었고, 실제 기온보다 많이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작년 9월에 바닷마을의 태풍을 아주 조금은 경험했는데, 당연히 그만큼은 아니지만 바닷마을의 바람은 좀 다르다. 12월 안산에서 돌아온 날, 현관문 앞에 웬 풍선 하나가 날아와 있었다. 환영표신가? 혼자 의미를 갖다 붙이고 말았는데 다음날은 커다란 비닐봉지가 집 앞에 날아와 있었다. 슬쩍 무서워져서 내가 뭐 잘못했나? 한동안 아무것도 없다가 다음엔 빈 아메리카노컵이, 그다음에 1107호 라벨이 붙은 택배상자를 보고서야 알았다. 우리집은 복도식 아파트 1101호,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저쪽 끝집인 1107호에서 현관문 앞 복도에 쌓아둔 재활용쓰레기 같은 것들이 날아온 거였다. 암튼, 바람이 종일 많이 불었고 추운 날이었다.

 

걷고 있거나 걷고 돌아오면 걷기를 예찬하게 되는데, 나가기까지는 아직도 깔끔하지 않다. 날이 추우니 더욱 그러했고, 저녁에 예매해놓은 영화를 취소할까 생각까지 들었으나... 17일 동안 꾸준히 해온 걸 춥다는 이유로 관두는 게 아쉬웠다. 더 추운 날도 있었고, 집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후회만 할 것 같았다. 영화 보러 갈 때는 그래도 세수하고 선크림이라도 발랐는데, 오늘은 날도 흐리고 나갈 때의 시각이 이미 5시였던 데다 여느 날보다 좀 깊은 갈등 후의 외출이다 보니 괜히 나가는 것만도 어디냐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나갔는지는 차마.

 

바람이 많이 불면 새들의 움직임이 더 집단적이 되고 활발해지는 걸까? 집 뒤쪽에 미륵산 줄기가 있어 보통은 까마귀들이 울거나 날아다니는데 오늘은 정말 오십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은 까치들이 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그렇게 많은 까치들을 떼로 본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운하해안로에서는 보통 때는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볼 수 있었던 갈매기들이 엄청 무리를 지어 있었다. <비밀보장>을 들으며 걷던 중이라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가니 말 사이로 그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좀 무서웠다. 새들은 많이 있으면 왜 무서울까. 히치콕의 <새>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 영화프로그램에서 봤던 장면들이 각인이 된 걸까? 암튼 좀 무서웠다, 까마귀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가는 길이니 오늘은 다른 길,이라고 무심코 생각하다가 강구안을 지나 블럭제빵소를 찍고 정량동 쪽으로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구안은 한동안, 감싸주고 싶을 만큼 어수선하고 풍경이랄 게 없는 모습이었는데 폐수정화였나 하는 말이 붙어 있던 큰 수중시설들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거라도 없으니 훨씬 나아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블럭제빵소빵은 참 맛있고 내게는 많이 비싸다. 지난 주에 영화 보고 들른 마트에서 사온 천 원짜리 식빵으로 토스트를 해먹었는데, 아... 나도 모르게 블럭제빵소를 찍고 정량동 쪽으로 빠지게 된 이유가 거기 있었던 모양이다. 동피랑호떡가게도 오랜만에 지났는데, 천원짜리 토스트로 배가 부른 상태라 사먹지 못했다. 아끼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천 원짜리 식빵은 삼가도록 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영화 시작 시간에 맞춰 나간 길이어서 절반은 해가 진 뒤에 걸었다. 지금의 집을 물리적으로는 좋아하지만, 계약이나 집주인이나 제반 상황과 관련해서는 마음에 드는 점이 1도 없기 때문에(라고 순화해서 기록) 2년 후가 될지 4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이미 다음에 살고 싶은 곳을 찍어두었고 정량동이다. 그래서 일부러 지나갔지만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날씨도 추워서 별달리 보이는 것도 느낌도 없었고, 시청 제2청사를 지날 때는 바람의 언덕에 오른 기분이었다. 그렇게 100분을 걸어 영화관에 도착하니 마음이 좀 상쾌해졌다. 이 기분,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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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