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15. 23:52

 

점심 때부터 해질녘까지 열 통쯤의 전화와 너댓 건의 문자, 부동산 방문으로 부산했다. 그렇게 하기로 한 계약서가 있고 전날 확인 연락을 했는데도 다른 말이 들려오고, 나는 당황과 동시에 바닥 수준의 신뢰마저 상실했다. 그랬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을 예사로 번복할까. 빨라야 다음 주 혹은 1월 말이 되어야 해결이 되겠지만, 어쨌든 일단락은 될 것이다. 변신은 어렵다. 왜 어려워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어려웠다.

부동산에서 나와 영화를 보러 갔다. 진이 좀 빠졌고 5시 정도였기 때문에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들으며 마음을 가벼이, 홀가분하게 하며 걸었다. 어제 영화 본 후에 장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5회를 들었는데 김생민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물론 이 때는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기 한참 전이었고, 그는 정말 웃겼으며 심지어 고민 사연자에게 모은 돈에서 10만 원을 남겨 통영 여행을 하라는 조언을 해서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통영을 마음에 둔 후, 어디에선가 통영이라는 말을 들으면 갑작스런 친근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 살게 되니 더하다. 그런데 그가 통영이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태도에 대해 나름 깊이 고민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폭력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온전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대처하고 연대해야 하는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마땅한 징계와 처벌을 받아야 하며 반성과 성찰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당연하고 사실 쉽기도 하다. 그런데 어려운 부분은, 성폭력 가해자는 그렇다면 기존의 모든 관계를 단절당한 채 고립되고 세상에서 파묻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나랑 아무 상관 없는 김생민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로 인해 떠오른 어떤 사건과 인물(지인)이 다시 불러온 생각이다. 많이 어렵게 느꼈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장을 보고 정류장까지 걷고 버스를 타고 하며 어쨌든 5회를 들었다. 4시 이후 산책길에는 <비밀보장>을 듣게 될 테고 앞으로도 그가 자주 등장할 텐데 스킵해야 할지 그냥 들어야 할지, 내 선택이 갖는 의미랄 건 없지만 계속 생각이 날 것 같다.

해저터널을 지나 간만에 운하해안로를 걸었다. 드문드문 여행을 온 듯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요일을 따지지 않으며 시간을 보낸 지가 꽤 되었다. 너무나 편안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무의미하다고도 느끼는 날들이다. 전에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공감을 했었다. 어려서도 그런 편이었지만 서른 이후의 나는 혼자하는 것들이 참 많다. 혼자 사는 게 기본값이고 좋아하는 걸 즐기는 일도 대부분 혼자다.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도, 가끔의 예외가 있지만 여행도 혼자 한다. 그렇게 혼자하는 걸 어렵게 느끼지 않았고, 그 상태를 온전하고도 홀가분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라는 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혼자 오래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 타인을 수용하는 깊이도 폭도 얉아지고 좁아짐을 느낀다. 일을 할 때에는 좋든 싫든 사람들 속에 있으니, 길지 않은 일과 중에도 피곤을 느낄 때면 어서 혼자가 되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지난해 유월까지 일했다. 반년이 넘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통영으로 뚝 떨어져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게 때로는 무덤처럼 편안하다. 뭔 소리니.

어제오늘 통영은 훈풍이 불어오는 봄날 같았다. 오늘은 운하를 따라 해안로를 걸어 강구안을 지나쳤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지만 해질녘의 노을과 점점이 켜지는 조명들을 보며 여행자 같은 기분이 되어 걸었다. 움직여야만 느낄 수 있는 살아있다는 감각, 가끔은 뭘 위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상팔자 인정) 아무려나 또 다른 시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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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