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이 삼십년 짝사랑해왔다는, 성실한 흠모의 결정체가 책으로 거듭났다는 느낌. 잊고 지냈던 두 권의 평전에 대한 바람을 오랜만에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순정하고 정갈한 향수의 시편, 빛바랜 사진이 주는 첫 인상과 달리 갈구하고 절망하는 여러 겹의 연정 속에서 분방한 자기모순을 끌어안고 살았던 청년 백석의 삶이 반가웠다. 하지만 그 어떤 개인도 시대를 비껴갈 수 없듯이, 낭만과 모던으로 상징되는 해사하게 빛나는 시절은 짧았다.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민족과 신념을 온 삶으로 받아들여 결과적으로는 부화뇌동했던 다수의 식민지 지식인들과 꽤나 결이 다른 길을 걸었지만.. 문학적 순결함을 지키고 인간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고뇌와 침묵, 더불어 살아내기 위해 감내해야 할 가난과 곤궁이 깊은 삶이기도 했다.
드문드문 알려진 행적과 작품으로 재구성한 북한 시절의 이야기에는 시스템이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영혼을 어떻게 복속시키는지가 너무 참담하게 드러나 읽어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창작생활이 끝난 1962년에 멈춰 있고, 여전히 복권되지 못한 그의 인생 마지막 삼십여 년은 '전원생활'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시구는 잘 알려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흰 바람벽이 있어"의, 거의 전율에 가까운 공감을 부르는 몇 구절이었다. 독특한 향토색을 구현하는 방언과 고향의 이미지화 같은 부분은 실은 관심 밖이고, 시에 대한 소양이 없으니 미학적으로 매료된 적도 없다.
안도현 시인의 복기로 되살아 난 시인 백석은, 내게 시보다 외모보다 어쩌면 감성과 성정과 처신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듯 하지만 첫 눈에 반한 여인에게 뜨겁게 몰입하고 도덕적 딜레마를 떨치고 동거까지 불사했던 열정, 문단의 대다수가 이름이라도 거는 친일에 가담하고야 말았을 때 스스로를 지키고자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두고 만주로 떠난 강직함과 용기, 결국은 피할 수 없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끝내 일본말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자존심 같은 것들 말이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 시인을 정말 사랑한 것 같다. 사랑을 동력으로, 그 대상을 되살려낼 수 있다는 건 부럽고도 고마운 일이다. 활자든 환상이든 현혹이든 말이다.
안도현
다산책방, 2014.6.11초판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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