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1. 28. 01:37

 


부제로 붙은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문구와 책 소개를 보고 재미있게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이전 독서가 선사한 흥미진진한 충만감 때문인지 읽기 시작할 때 적잖은 기대감이 일렁였는데 그런 마음은 중반부에 이르기 전에 사라졌다. 생물학과 지질학 등 과학 연구자인 저자 호프 자런의 삶과 일, 관계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보다 훨씬 뜨겁지만 덜 정제된 느낌이었고 때로 그가 하는 일만큼이나 커다란 끈기를 요구하는 읽기였다.  

저자는 자신의 삶과 일의 경험을 필요에 따라 매우 구체적이거나 혹은 듬성듬성하게 시간순으로 서술하면서 연구 대상인 식물 세계와 연결한다. 겨울이 긴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에서 북유럽 이민자의 후손으로 보낸 어린 시절과 대학 진학 이후의 독립적인 삶, 실험실을 주요 무대로 보낸 청년기와 결혼과 육아, 박사 과정부터 함께한 빌과의 만남과 이란성 쌍생아라고 묘사할 만큼의 오랜 파트너십 등 자전적 일대기가 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실험실과 연구 과정에 대한 세밀화 같은 묘사들, 전쟁이나 우주 과학 분야와 비교할 때 규모가 작고 언제나 부족한 식물 관련 예산과 재정 확보 문제, 학계에 만연한 성차별 등 자신이 속하고 경험한 과학계의 크고 작은 면모가 다른 한 축이다. 전공 분야인 나무와 땅에 관한 정보와 지식 그리고 연구 과정에서의 깨달음, 식물의 생장과 생존 방식을 인간의 삶에 투영할 때 갖는 의미들이 더불어 서술된다.   

저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이다. 문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해서 네 아이를 낳아 기른, ‘늘 화가 나 있는’ 엄마와 함께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문학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다.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전문대학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함께 실험실에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에서 나름의 따스함을 묻어나는 데 반해, 책을 헌정한 엄마와의 유대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부모와 그들이 만든 환경에서 형성된 저자의 특성이 글을 쓰는 과학자로 살아가는 토대가 되고, 훗날 빌의 당부와 만나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학 시절까지를 다룬 1부가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잘 읽혔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며 만난, 근무 시작 전 담배 세 갑을 몰아 피우고 기계처럼 일한 밤 퇴근할 때면 여직원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리디아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단편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던 저자가 학부 논문 주제인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만나는 인물에 빗대는 부분은 그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적절하게 느껴졌고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저자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고 이후가 기대됐지만, 중반부 이후의 전개에서는 전체적으로 TMI가 많고 산만한 데다 장황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저자의 일상과 식물 세계의 원리를 나란히 서술하는 데에서 때로 연결고리가 허약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전반적인 구성이 불균형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아쉬웠다. 

초반에 서술된 어린 시절이 그렇게 어둡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중반부 이후 늘 조울증에 시달리고 때로 광기에 휩싸이며 온갖 불운한 상상이 함께했던 과거가 당위적 전제처럼 등장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리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서술이 연관되는 부분은 미시시피 강변의 덩굴옻나무 연구 과정에서 얻은 급성 알러지 치료약 후유증이나 임신으로 평소 복용하던 약을 끊은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으니 이해하고 싶었지만, 마치 초면인 사람이 불쑥 자기 힘든 이야기를 쏟아 붓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즈음부터 내게는 글도 인물도 좀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그런 서술 방식을 통해 당시 느꼈던 기진맥진함과 숨 막힘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한 거라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머릿속에 늘 생각이 많고 어떤 상황에서든 관련된 다양한 상상이나 회상, 공상 등이 뇌리에 떠오르는 스타일의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상상들까지 집요하게 기술하거나 별로 와 닿지 않는 비유 혹은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수식어를 붙인 문장들이 중반 이후 자주 의식됐다. 사소한 모든 것까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과정을 수십 년간 집요하게 반복하면서 강화된 성향이 글에도 반영된 것일까 싶기도 했다. 하여, 1부 마지막에 등장해 저자와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친밀성을 나누는 빌이 내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저자에 의해 형상화되고 기록된 모습이지만 말이 별로 없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궁금해 할 여지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1월의 모임 책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읽어야만 했고, 민망하지만 본문 전반에 걸쳐 빌드업되는 빌과 저자의 관계가 독서를 끌어가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 20대 중반부터 내내 붙어 지내며 빌과의 이성애적인 교감이나 일방적이었더라도 감정의 파고 같은 것이 한 번도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헐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예측할 만한 서술이 존재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빌에 대한 감정은 이성애를 제외한 사랑과 우정, 의존, 지지 등 한 인간이 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긍정적인 감정의 총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단지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도 얼핏 그린라이트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생략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저자에 대한 빌의 감정은 알 수 없고, 보편적이고 익숙한 감정의 토대 위에서 글을 전개하는 게 극적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관계 맺기이기 때문에, 힘겹게 읽은 만큼의 관계는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구절절 쓴 만큼 별로이기만 한 건 아니긴 했다. 저자의 성향, 식물에 대해 알려진 지식들, 빌과 저자의 관계, 과학과 일의 세계 등 서술되는 모든 면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불규칙하다 못해 일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는 실험실 생활에 대한 묘사들은, 저자의 학문적 성취와 위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젊은 날의 오랜 불안과 방황과 치열함이 뒤섞여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영감을 받는 이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치열하게 해나가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치열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밀고 나갔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세계에 매진하는 이야기가 내게는 멋있기보다 도저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저자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금세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전혀 몰랐던 식물 세계의 인상적인 단편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도 적어둔다.  

 


호프 자런•김희정 옮김
2017.2.16.1판1쇄 2018.1.15.1판9쇄 펴냄, 알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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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