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부산에 다녀왔다. 3월 하순 이후 처음이니 4개월 만이다. 개봉 예정 영화 살펴보며 날짜를 꼽고 있었는데 적당한 날짜에 숙박세일페스타 쿠폰이 떴길래 2박을 예약하고, 영화는 무리하지 않고 5편만 보고 왔다. 여행 다녀온 지 딱 한 달 됐는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오자마자 며칠은 살짝 비몽사몽이었고 정신 차린 뒤에는 멍 때리다가도 뇌리를 스치는 여행의 여운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잦았다. 여행 준비하며 들락거렸던 체크인유럽 카페에 습관적으로 들어가 여행을 앞둔 이들이나 여행 중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다음 여행을 상상하고는 했다. 그리고 다음 여행은 부산이 되었네.
첫 번째 영화 시작 시간이 늦게여서 여유롭게 출발해 저녁에 숙소에 도착했다. 통영 이사 후 몇 년간 부산에 영화 보러 다니면서 범내골역이랑 서면역 쪽 숙박업소 여러 군데 전전하며 찾은 나름 양호한 두세 군데 중 한 곳이었는데, 갑자기 2박이라고 연박비 만 원을 내라고 해서 약간 시무룩해졌다. 왕복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쓰면서 영화 보러 다니는 게 너무 팔자 좋은 짓 같아 가급적 싸면서도 그런대로 깔끔한 편인 모텔을 고수해왔는데, 저어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지 좀 됐다. 정확히 반비례하는 낮은 숙박비와 쾌적함 중에 늘 전자를 선택했었는데 연박비 만 원 때문만은 아니지만, 약간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여행 떠나며 극장에서 영화를 몇 편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류블랴나에서 본 [퍼펙트 데이즈]가 참 좋아서 프라하에서 다시 봤었다. 서사가 복잡한 작품은 아니지만 일본어 대사에 슬로베니아어와 체코어 자막이었기 때문에 디테일한 내용은 모르고 넘어갔다. 한국 가서 복습해야지 했는데, 첫 영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좋은 영화는 두 번 세 번 봐도 좋지만 어떤 영화도 처음 볼 때만큼 좋을 수는 없는 것 같다. 5월과 6월에 [퍼펙트 데이즈]를 보면서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한국어 자막으로 확인한 대사들이 의외의 내용이어서 혼자 웃겼다. 가끔은 구체성보다 피상성이 뭔가를 완결해주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고, 내맘대로 정리.
다음날 본 [프렌치 수프]와 [유로파]는 감독의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었다. 어렸을 때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를 분위기에 휩쓸려 보았고 트란 안 홍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됐는데, 영화에 대한 큰 감흥은 없었다. 이후 영화제에서 본 [쓰리 시즌]이 유난히 힘들었어서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이지만 트란 안 홍 감독에 대한 선입견으로 망설이다가 딱히 볼 게 없어 [프렌치 수프]를 예매했다. 몹시 그저 그러하여 역시 안 맞는 감독은 안 맞는구나 생각했는데, 찾아 보니 [쓰리 시즌]은 배경이 베트남이었을 뿐 감독은 토니 뷔라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을 믿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지 좀 됐는데 여전히 이렇다. [유로파]는 스틸 컷으로 유명한 몇몇 흑백 장면들과 강렬한 분위기 말고는 기억에 없어서 다시 봤는데, 간만에 온몸으로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뉘른베르크를 짧게 여행하며 나치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등 유럽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환기됐고, 덕분에 예전보다는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그랑 블루]를 재개봉하는 것 같던데 어릴 적 ‘순수의 얼굴’ 중 하나였던 장 마크 바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마지막 날 첫 영화는 고 이선균 배우가 아니었다면 볼 일 없었을 [탈출-프로젝트 사일런스], 재난 영화는 취향이 아니지만 액션과 폭력이 난무하는 건 아니어서 볼 만했다. 영화보다는 이선균 배우를 보는 시간이었다. 그의 존재를 아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만 미디어와 여러 작품들 덕에 현재적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컸던 터라, 스크린에서 생동하는 고인의 모습에 자주 사무치는 마음이 됐다.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전날 본 [유로파]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내용이었는데 나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여행할 때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봉 중이어서 볼까 말까하다가 영 못 알아먹을 것 같아 관뒀었는데, [퍼펙트 데이즈]처럼 막 오해해도 좋을 영화는 아니어서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서 나오다가 건물 지하에 있던 홈플러스가 문을 닫았다는 걸 알게 됐다. 3월에도 왔었는데 그때는 안내문이 없었던 건지 못 본 건지 모르겠다. 작은 영화관들이 제법 있는 서울과 달리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지금은 cgv서면의 아트하우스뿐이다. 남포동의 모퉁이극장도 있지만 동선이 불편하고, 수년간 영화를 보며 쌓인 멤버십 포인트와 각종 쿠폰 사용의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영화 보는 걸 오래 좋아했고 일상의 가장 큰 낙인 사람으로서 그렇게 싫어하던 대기업 체인 영화관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약간 자존심 상하지만 현실은 현실, 지오플레이스와 cgv서면의 아트하우스의 존립에 생각이 미쳤다. 어쨌거나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은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