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안식년을 맞은 M이 석 달쯤 유럽 여행 예정이라며, 2월 하순 통영에 오겠다고 했다. 출국일이 2주도 안 남은 시점이지만, 고맙고 반가워서 무리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장시간 버스 이동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천공항 마중과 김해공항 배웅을 약속하고, 이 참에 나도 부산행 운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통영에 왔던 세 번 모두 매우 화창했던 자칭 날씨요정이라, 약속한 날짜의 불안한 일기예보에 비 오는 통영도 보고 싶은가보다 했는데 낭만적인 예상이었다. 출발일 아침 M은 난생처음 비행기 결항을 경험하며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티켓을 바꿨고, 나는 항공기상청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날도 날은 궂었지만 비행기는 떴고 빗길 운전으로 사천공항에 닿아 M과 만났다. 무사히 1차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고속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부산까지의 운전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 함께라는 든든함에 더해, 험한 날씨 덕에 도로 위의 모두가 조심하는 느낌이라 맑은 날보다 오히려 나았던 것도 같다. 부산에 진입하자 예전에 가끔 G의 차 조수석에 앉아 달렸던 길들이 이어졌다. 운전석에 앉은 스스로를 신기해하며 영도 초입 숙소에 도착했고,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기계식 주차까지 완료하며 새로운 경험 하나를 더했다.
영도는 십여 년 전 희망버스 타고 단기간 여러 차례 다녀간 이후 처음이다. 가끔 생각나면 찾아 듣는 사이의 노래 "영도" 그리고 얼마 전 본 전수일 감독의 [라스트 필름]을 떠올리며 숙소에서 가까운 깡깡이마을을 돌아봤다. 퇴락한 소도시에 몇 년 살다 보니, 도시재생의 안간힘으로 꾸며진 이런저런 조형물들과 문 닫힌 상점과 인적 없는 거리라는 요소를 공유하는 장소들의 분위기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텅 빈 세트장 같은 평일 낮과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주말의 밀도는 사뭇 다르겠지만 그 간극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공간들은 사실 좀 쓸쓸하다.
공격하듯 몰아치는 비바람이 계속됐지만 저녁에는 영도대교를 걸어 롯데백화점 옥상 정원에서 나름 전망도 구경하고 남포동 비프거리와 깡통시장까지 돌아보며 1박 2일 관광객 모드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길바닥의 핸드프린트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예전에 왔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동판 안내문에도 열중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지척이지만 관심이 없어 몰랐던 깡통시장에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줄지은 푸드트럭들과 어디 있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파들이 진풍경이었다. 와중 몹시 세찬 바람에 무시로 놀라는 M과 달리 나는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통영에 몇 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바닷바람에 적응된 것 같아 환경은 무서운 거구나 느꼈다.
밤산책이 불가능한 날씨여서 숙소에서 수다를 떨다가, 여행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들었던 생각 '나도 가고 싶다'를 M에게 전했다. 3월 초에 시작되는 M의 긴 여행은 산티아고길을 시작으로 중부 유럽과 북유럽까지 여럿의 동행이 교차하는 계획, 마침 스페인 동행 중 O는 나도 좀 아는 사이다. 내가 말했지만 셋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조만간 결정하기로 하고, 그러고 나니 내게는 이번 부산행의 가장 큰 이슈가 유럽행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고는 싶은데 당장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는 걸 부정할 수 없고, 섣부른 제안은 아닐까 곱씹게 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싶은 느낌.
다음날 체크아웃 후 공항에 가기 전 시간이 있어 시장통에서 빵을 사고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다. 십여 년 전 한진중공업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았던 기억을 함께 떠올렸지만, 조선소 맞은 편에 있었던 아파트 단지 말고는 모든 게 새롭기만 했다. 상전벽해라고 말하기에는 이전의 기억들이 너무 흐릿하지만 말이다. 김해공항에서 M과 작별하고 내비의 도움에도 불구 공항 주변을 뱅뱅 돌고 마창대교 전후에서도 드라마틱하게 헤매며 어렵사리 통영에 도착했다. 통영시에 진입한 이후 스스로가 너무 대견해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어, 동호항 방파제에서 과자를 먹는 것으로 부산우중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짧고 굵게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고, 짧게나마 함께 여행할 결심을 말한 여행. 그럼 나 유럽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