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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알리바이2024. 11. 14. 23:37

 

 

몇 년간 영화를 보기 위해서만 갔던 부산에, 다른 목적으로 다녀왔다. 내년 1월 중순 계약 만기와 함께 통영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다음 서식지는 바다와 영화가 공존하는 부산으로 결정했다. 4년 전처럼 한 달 살기로 집을 알아보기는 여의치 않아 두어 달 전부터 네이버부동산에서 전세 현황을 나름 모니터해왔다. 불안한 마음에 이사예정일보다 너무 이르게 집을 구하러 다니다 불가피하게 두 달을 월세로 살고 전세로 전환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던 시행착오를 떠올리며, 이사 두 달 전쯤 집을 찾아보기로 했고 그게 이번 주였다.

 

한 달 전부터 탐색하며 괜찮을 것 같은 집들을 찜해놓았고, 지난주에는 남아 있는 곳들 중 궁금한 몇 곳을 찍어 부동산에 연락했다. 수십 번 왕래했지만 넓은 부산에서 친숙한 곳들은 영화관 주변뿐이다. 지도앱에서 cgv서면, 영화의 전당, 모퉁이극장 등을 검색해 찜한 집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낭만적인 온라인 임장질로 워밍업을 마쳤는데, 현실은 달랐다. 사는 건 매일이고 영화 관람은 가끔이니, 지역보다는 예산과 내부 컨디션을 우선해야 했고 바다가 가까우면 좋겠다는 바람은 애써 후순위로 미뤘다. 일단 월요일 저녁에는 서부산터미널 주변 사상구, 화요일 낮에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사하구, 저녁에는 조금 이동해 수영구의 집들을 보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집을 보여주기로 한 분의 시간에 맞추느라 월요일 저녁 서부산터미널에 도착해 여섯 군데의 집을 보았다. 한 집이 궁금해 연락하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사상구는 교통이 편리하고 편의시설들이 밀집한 곳이라 집의 면적이나 컨디션에 비해 가격대가 높았다. 문의했던 복층 테라스 오피스텔은 좁은 데다 구조가 조악했고, 중개사가 보여준 다른 집들도 굳이 그쪽에 살아야 하는 게 아닌 입장에서 매력이 없었다. 저녁 시간에 여러 집을 보여주신 중개사님께는 미안했지만 사상구는 후보에서 제외, 버스를 타고 숙소를 예약한 남포동으로 향했다. 대학 시절 2회 부산국제영화제로 난생처음 부산에 왔을 때의 인상이 각별한 곳이어서, 버스에서 내려 마주한 맞은 편 골목의 피프광장 표식에 괜히 마음이 설렜다. 

 

숙소는 그리핀호텔. 다른 방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묵은 508호는 창문에 벽돌 패턴의 벽지를 붙여 놓은 듯, 창과 옆 건물 벽이 거의 붙어 있어 뷰는커녕 외풍이 스며들었다. 제법 호텔스러운 프런트에 비하면 방은 그냥 모텔 수준이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한기 때문에 커튼을 닫아두니 감금된 느낌. 쾌적함도 포근함도 미진한 방이 춥기까지 해서 냉난방기를 틀었으나 찬바람이 나왔다. 다시 조작하고 기다리고를 반복해도 마찬가지여서 프런트에 물었더니 냉난방은 중앙에서 제어하는데 아직 냉방 모드라며 전열기를 갖다 줬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세 계절 창고에서 묵으며 뽀얗게 먼지가 앉은 전열기를 그대로 전하며 한껏 친절한 태도를 보인 직원에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부산행 버스에서 몇 십 년만인지 모를 멀미에 속이 많이 불편했고 숙소도 여러모로 저조한 관계로 피곤이 몰려왔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며 ‘피프광장’에 잠시 반색해 밤 산책을 떠올렸던 마음은 사라졌고 푹 쉬다가 일찍 자기로 했다. 배구 경기가 없는 날이어서 볼만 한 프로그램을 찾다가 ebs 지식채널이 있어 플레이했는데, 백석 시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에서 일하며 오래 준비했던 통영 이주를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상징적으로 이끌어줬던 존재가 백석 시인이었는데, 적응에 장렬히 실패하고 새로운 이주를 준비하는 마당에 조우하니 새삼스러웠다. 통영행을 앞두고 신조처럼 되새겼던, 여전히 휴대폰 배경화면인 “선우사”까지 마주하자니 우연치고는 신기하기도 했다. 무의미의 신만은 아무데나 의미 부여하는 자의 편인 것인가.

 

화요일에는 우리 동네가 될지도 모르는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아홉 곳의 집을 보았다. 특정 매물에 대해 문의했지만 원하는 조건을 확인하고 함께 볼 수 있는 집들을 미리 섭외해 보여준 중개사도 있었고, 미리 약속했음에도 도착 전 확인 문자를 보내자 그제서야 아파서 못 나갔다며 관리인 전화번호를 전해주는 중개사도 있었다. 사하구에서 본, 경사진 골목과 언덕을 올라야하지만 내부가 깔끔하고 바다가 보이는 한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보자마자 결정하는 건 경솔한 일 같아 결정을 미뤘다. 매매와 전세 둘 다 내놨고 이사예정일이 임박해 다른 데서도 계속 보러 온다는 그 집을 놓칠까봐 걱정도 됐지만, 한 달 넘게 계약이 안 됐는데 고민하는 하루 사이에 누군가 계약한다면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수영구로 이동해서 본 집들은 무척이나 언덕에 위치해있었다. 다락과 옥상이 있는 집도 나쁘지 않았는데 과자질 봉인 해제각인 데다, 낮에 본 집이 아른거려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세 지역 중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수요일과 목요일에 다른 지역의 찜했던 집들을 보러가는 걸로 생각하고 왔는데, 이틀 동안 열다섯 군데를 보고 나니 약간은 감이 오는 느낌이었다. 바다가 보였던 집으로 마음은 점차 기울었지만 척박한 주변 환경에도 생각이 미치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다 가질 수는 없고 한 번은 결정해야 하는 거니까. 수요일 오전에 부동산에 연락해 가계약을 하기로 하고, 집을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가계약금을 입금하고 부동산에 부탁해 평면도를 인쇄하고 미리 챙겨간 줄자로 대략의 사이즈도 측정해 메모하는 걸로 이번 부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마쳤다. 다음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동네를 둘러보고 감천문화마을을 고지 삼아 산을 넘어서 남포동까지 걸었고, 여행자처럼 피프광장을 구경하다 서면으로 이동했다.

 

집 구하는 게 어떻게 될지 몰라서 다른 숙소들도 예약해 4박 일정으로 왔고, 2년 전 검진했던 산부인과에서 자궁경부암 공단 검진도 예약한 터였다. 실은 영화도 짬짬이 예매했었는데 월요일과 화요일은 취소했다. 수요일 숙소는 노블온 숙박권으로 예약한 프롬에이치 레포잉호텔, 오픈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게 지겹지만 옥상정원에서 과자를 먹을 수 있고 시설이 전반적으로 깔끔한 데다 방에 전자레인지가 있어 몇 번 묵었던 곳이다. 체크인 전에 옥상에 올라가 과자를 먹고, 푹 쉬려고 입실했는데 짐 풀고 텔레비전을 켜니 고장이어서 다 풀었던 짐을 다시 챙겨 방을 옮겼다. 별 건 아니지만 1차 짜증이 났는데, 다음날 체크아웃하며 짐 보관하러 안내된 사무실에 가니 아무도 없고 공사 중인 데다 전화 연결도 안 돼서 2차 짜증이 났다. 시설에 비해 관리가 엉망이란 건 전에도 경험했지만 마지막까지 꾸준하니 인정.

 

목요일에는 고대했던 영화들, [마리우폴에서의 20일]과 [아노라]를 보았다. 몇 년간 부산행의 주목적이었던 곳에 며칠 만에 오니 혼자 괜히 감개무량.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오전 10시 상영인데도 뒤쪽 좌석 세 줄이 다 차있어서 뭘까 했는데 군인 단체 관람이었다. 영화는 다큐와 픽션이라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각각 다른 의미로 둘 다 좋았다.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시민들과 얼마 후 함락된 마리우폴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전쟁의 가해자 러시아를 본 후에, 국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반의 가족과 관계자들과 이고르 그리고 아노라의 선대로서의 러시아를 접하는 건 뭔가 쉽지 않은 여운을 남겨주기도 했다. 국가와 그 구성원에 대한 동일시나 어떤 대상에 대한 일면적 인식이 가지는 오류에도 생각이 미치지만, 게으른 자에게는 어려운 사유다. 

 

수요일에 가계약을 한 후에 목요일 영화 예매를 하면서, 금요일이었던 산부인과 검진 시간을 영화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변경했다. 예약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바로 검진이 가능했고, 숙소 체크인까지 한 시간이 비었다. 가방이 무거워 돌아다니기는 힘들고 카페에 들어가기는 아까워서, 옆 건물의 치과로 들어갔다. 어차피 공단 검진과 스케일링을 해야 해서 그냥 들어가 봤는데, 거의 대기 없이 진행됐고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친절했다. 통영에서 검진이나 진료 받으러 병원 갈 때마다 한 시간은 기본인 대기 시간에 여러모로 마뜩잖은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걸 생각하면, 다른 세상 같았다. 예정에 없던 검진 하나를 해결하고 무척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마지막 숙소로 향했다.

 

금요일 숙소는 여기어때에서 늦은 입실 이벤트가로 예약한 서면비즈니스호텔J라는 곳이었다. 저렴한 가격이라 변경이나 취소는 불가. 수요일 가계약 덕분에 부산행의 오점이 된 셈이지만, 돈 날리는 건 아까우니 큰 화면으로 배구 경기 볼 수 있는 걸 위안 삼기로 했다. 건물에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어 입구에서부터 찜찜했는데, 배정된 608호는 카운터에서 한참 들어가 B동이라 이르는 곳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방으로 향하는 계단에 갖은 기물들이 널브러지고 쌓여 있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고,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만든 듯한 객실과 욕실 역시 찝찝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부분부분 빛바랜 벽지, 옆 건물 벽과 맞닿은 창문과 낡은 창호, 먼지 덮인 티슈커버, 얼룩진 의자, 은은한 방과 달리 확연한 욕실의 곰팡이 냄새까지. 

 

문을 열자마자 불쾌감이 솟구치는 숙소는 오랜만이었다. 통영에서 처음 부산영화여행 가며 돈 아낀다고 2만 원대에 예약했다가 기겁했던 모텔이 떠올랐고, 2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멋모르고 잡았다가 젊은 패기로 버텼지만 나중에 지인이 듣고 기겁했던 남포동 시장통의 여인숙도 떠올랐다. 현실을 부정하며 텔레비전을 틀었지만 마땅히 볼 게 없었다. 망연자실을 가장해 그냥 나갈까 말까 심히 갈등하던 중 나타난 모기 한 마리 덕에 마음을 굳혔다. 살짝 부려놓았던 짐을 다시 싸고 나가서 카운터에 퇴실하겠다고 하니 다른 ‘멀쩡한’ 방을 보여줬는데, 나름 장고 후의 결정이었고 숙소 자체에도 정이 떨어져서 그냥 나왔다. 다행히 퇴근시간 전이어서 사상역까지 지하철은 쾌적했고 통영행 버스도 평소보다 빠른 75분 만에 도착, 빨리 갈 욕심에 터미널에서 집까지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지만 총 이동시간은 양호한 편이었다.

 

금을 이렇게 날리는 건 평소에 없는 일이지만, 돈 아끼자고 볼 일 다 봤는데 찝찝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건 더 멍청한 일이다. 가계약 후에 다시 집을 보러 갔을 때 중개사가 줄자 챙겨온 걸 놀라워했는데, 서면비즈니스호텔J 예약은 이런 준비성과 알뜰함이 과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잊어버리기로 했는데, 가끔은 과유불급이지만 어쨌든 알뜰함과 준비성은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려나, 3박 4일 동안 다양한 불편을 장전한 세 군데 숙소를 경험하고 돌아온 집은 너무나 편안하다. 집 구하기라는 중요한 과업을 완료했고,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보았고, 공단 검진도 두 가지나 했으니 이번 부산행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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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4. 7. 12. 22:22

 

 

오랜만에 부산에 다녀왔다. 3월 하순 이후 처음이니 4개월 만이다. 개봉 예정 영화 살펴보며 날짜를 꼽고 있었는데 적당한 날짜에 숙박세일페스타 쿠폰이 떴길래 2박을 예약하고, 영화는 무리하지 않고 5편만 보고 왔다. 여행 다녀온 지 딱 한 달 됐는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오자마자 며칠은 살짝 비몽사몽이었고 정신 차린 뒤에는 멍 때리다가도 뇌리를 스치는 여행의 여운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잦았다. 여행 준비하며 들락거렸던 체크인유럽 카페에 습관적으로 들어가 여행을 앞둔 이들이나 여행 중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다음 여행을 상상하고는 했다. 그리고 다음 여행은 부산이 되었네. 

 

첫 번째 영화 시작 시간이 늦게여서 여유롭게 출발해 저녁에 숙소에 도착했다. 통영 이사 후 몇 년간 부산에 영화 보러 다니면서 범내골역이랑 서면역 쪽 숙박업소 여러 군데 전전하며 찾은 나름 양호한 두세 군데 중 한 곳이었는데, 갑자기 2박이라고 연박비 만 원을 내라고 해서 약간 시무룩해졌다. 왕복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쓰면서 영화 보러 다니는 게 너무 팔자 좋은 짓 같아 가급적 싸면서도 그런대로 깔끔한 편인 모텔을 고수해왔는데, 저어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지 좀 됐다. 정확히 반비례하는 낮은 숙박비와 쾌적함 중에 늘 전자를 선택했었는데 연박비 만 원 때문만은 아니지만, 약간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여행 떠나며 극장에서 영화를 몇 편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류블랴나에서 본 [퍼펙트 데이즈]가 참 좋아서 프라하에서 다시 봤었다. 서사가 복잡한 작품은 아니지만 일본어 대사에 슬로베니아어와 체코어 자막이었기 때문에 디테일한 내용은 모르고 넘어갔다. 한국 가서 복습해야지 했는데, 첫 영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좋은 영화는 두 번 세 번 봐도 좋지만 어떤 영화도 처음 볼 때만큼 좋을 수는 없는 것 같다. 5월과 6월에 [퍼펙트 데이즈]를 보면서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한국어 자막으로 확인한 대사들이 의외의 내용이어서 혼자 웃겼다. 가끔은 구체성보다 피상성이 뭔가를 완결해주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고, 내맘대로 정리.

 

다음날 본 [프렌치 수프]와 [유로파]는 감독의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었다. 어렸을 때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를 분위기에 휩쓸려 보았고 트란 안 홍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됐는데, 영화에 대한 큰 감흥은 없었다. 이후 영화제에서 본 [쓰리 시즌]이 유난히 힘들었어서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이지만 트란 안 홍 감독에 대한 선입견으로 망설이다가 딱히 볼 게 없어 [프렌치 수프]를 예매했다. 몹시 그저 그러하여 역시 안 맞는 감독은 안 맞는구나 생각했는데, 찾아 보니 [쓰리 시즌]은 배경이 베트남이었을 뿐 감독은 토니 뷔라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을 믿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지 좀 됐는데 여전히 이렇다. [유로파]는 스틸 컷으로 유명한 몇몇 흑백 장면들과 강렬한 분위기 말고는 기억에 없어서 다시 봤는데, 간만에 온몸으로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뉘른베르크를 짧게 여행하며 나치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등 유럽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환기됐고, 덕분에 예전보다는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그랑 블루]를 재개봉하는 것 같던데 어릴 적 ‘순수의 얼굴’ 중 하나였던 장 마크 바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마지막 날 첫 영화는 고 이선균 배우가 아니었다면 볼 일 없었을 [탈출-프로젝트 사일런스], 재난 영화는 취향이 아니지만 액션과 폭력이 난무하는 건 아니어서 볼 만했다. 영화보다는 이선균 배우를 보는 시간이었다. 그의 존재를 아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만 미디어와 여러 작품들 덕에 현재적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컸던 터라, 스크린에서 생동하는 고인의 모습에 자주 사무치는 마음이 됐다.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전날 본 [유로파]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내용이었는데 나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여행할 때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봉 중이어서 볼까 말까하다가 영 못 알아먹을 것 같아 관뒀었는데, [퍼펙트 데이즈]처럼 막 오해해도 좋을 영화는 아니어서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서 나오다가 건물 지하에 있던 홈플러스가 문을 닫았다는 걸 알게 됐다. 3월에도 왔었는데 그때는 안내문이 없었던 건지 못 본 건지 모르겠다. 작은 영화관들이 제법 있는 서울과 달리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지금은 cgv서면의 아트하우스뿐이다. 남포동의 모퉁이극장도 있지만 동선이 불편하고, 수년간 영화를 보며 쌓인 멤버십 포인트와 각종 쿠폰 사용의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영화 보는 걸 오래 좋아했고 일상의 가장 큰 낙인 사람으로서 그렇게 싫어하던 대기업 체인 영화관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약간 자존심 상하지만 현실은 현실, 지오플레이스와 cgv서면의 아트하우스의 존립에 생각이 미쳤다. 어쨌거나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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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4. 3. 20. 22:22



1월 말 2월 초에 다녀오고 설 연휴에 2편 본 걸로 2월에는 자제했던 부산영화여행을 2박 3일간 다녀왔다. 숙박세일페스타 덕에 숙박비가 매우 세이브되었고 아트하우스와 vip쿠폰, cj포인트 반값예매 등을 총동원하여 7편 중 1편만 유료예매, 냉동보관 중이던 치즈케이크와 M과의 부산행 때 생긴 천혜향 등 바리바리 챙겨간 먹거리들로 채운 알뜰살뜰 나들이였다. 자영업자에게 도움 안 되는 패턴이지만 그렇게 아끼며 사는 덕에 지금껏 알음알음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고 있으니, 혼자 타지행에서는 좀처럼 변치 않는 루틴이기도 하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cgv앱을 엄청 들락거리며 일자별로 보고픈 영화를 적정히 구성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고 나름 완성한 최선은 1일차 2편, 2일차 4편, 3일차 1편이었다. 하루 4편은 소시적 부산국제영화제 때나 하던 짓인 데다 그중 3편이 러닝타임 140분 이상이어서 부담스러웠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들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첫날은 동심에 대해, 다음 날은 믿음에 대해, 마지막은 추억에 대해, 각기 다른 영화들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곱씹어볼 수 있었다-고 허세를 부려본다. 집으로 돌아와 바닥을 친 체력을 실감하며 한 달도 남지 않은 여행에 대한 걱정에 빠져든 건 덤.

 

[왓츠 러브]와 [조용한 이주]와 [메이 디셈버]도 보고 싶었지만, 소도시민 주제에 궁금한 모든 영화를 볼 수 없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물리적인 조건이 받쳐주지 않으니 포기하게 되는 부분과 더불어, 노화에 따른 불감도 증가 때문인지 어지간한 영화가 아니면 어릴 적처럼 빠져들고 사로잡히지 않더라는 경험치에 따른 무심함도 이제는 작용한다. 그럼에도 영화와 영화관 자체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으니 유럽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상상을 해보는데, 실현 가능한 상상이므로 기대가 된다. 아주 좋았던 데다 대사가 없는 [로봇 드림]이나 이미 본 적 있는 영화나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듯. 욕심껏 본 영화들 중 반 이상이 그냥 그러했지만, 올해 상반기 마지막이 될 부산영화여행은 그럭저럭 알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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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4. 2. 21. 18:44



올해 안식년을 맞은 M이 석 달쯤 유럽 여행 예정이라며, 2월 하순 통영에 오겠다고 했다. 출국일이 2주도 안 남은 시점이지만, 고맙고 반가워서 무리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장시간 버스 이동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천공항 마중과 김해공항 배웅을 약속하고, 이 참에 나도 부산행 운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통영에 왔던 세 번 모두 매우 화창했던 자칭 날씨요정이라, 약속한 날짜의 불안한 일기예보에 비 오는 통영도 보고 싶은가보다 했는데 낭만적인 예상이었다. 출발일 아침 M은 난생처음 비행기 결항을 경험하며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티켓을 바꿨고, 나는 항공기상청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날도 날은 궂었지만 비행기는 떴고 빗길 운전으로 사천공항에 닿아 M과 만났다. 무사히 1차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고속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부산까지의 운전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 함께라는 든든함에 더해, 험한 날씨 덕에 도로 위의 모두가 조심하는 느낌이라 맑은 날보다 오히려 나았던 것도 같다. 부산에 진입하자 예전에 가끔 G의 차 조수석에 앉아 달렸던 길들이 이어졌다. 운전석에 앉은 스스로를 신기해하며 영도 초입 숙소에 도착했고,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기계식 주차까지 완료하며 새로운 경험 하나를 더했다.

 

영도는 십여 년 전 희망버스 타고 단기간 여러 차례 다녀간 이후 처음이다. 가끔 생각나면 찾아 듣는 사이의 노래 "영도" 그리고 얼마 전 본 전수일 감독의 [라스트 필름]을 떠올리며 숙소에서 가까운 깡깡이마을을 돌아봤다. 퇴락한 소도시에 몇 년 살다 보니, 도시재생의 안간힘으로 꾸며진 이런저런 조형물들과 문 닫힌 상점과 인적 없는 거리라는 요소를 공유하는 장소들의 분위기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텅 빈 세트장 같은 평일 낮과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주말의 밀도는 사뭇 다르겠지만 그 간극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공간들은 사실 좀 쓸쓸하다. 

 

공격하듯 몰아치는 비바람이 계속됐지만 저녁에는 영도대교를 걸어 롯데백화점 옥상 정원에서 나름 전망도 구경하고 남포동 비프거리와 깡통시장까지 돌아보며 1박 2일 관광객 모드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길바닥의 핸드프린트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예전에 왔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동판 안내문에도 열중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지척이지만 관심이 없어 몰랐던 깡통시장에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줄지은 푸드트럭들과 어디 있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파들이 진풍경이었다. 와중 몹시 세찬 바람에 무시로 놀라는 M과 달리 나는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통영에 몇 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바닷바람에 적응된 것 같아 환경은 무서운 거구나 느꼈다.

 

밤산책이 불가능한 날씨여서 숙소에서 수다를 떨다가, 여행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들었던 생각 '나도 가고 싶다'를 M에게 전했다. 3월 초에 시작되는 M의 긴 여행은 산티아고길을 시작으로 중부 유럽과 북유럽까지 여럿의 동행이 교차하는 계획, 마침 스페인 동행 중 O는 나도 좀 아는 사이다. 내가 말했지만 셋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조만간 결정하기로 하고, 그러고 나니 내게는 이번 부산행의 가장 큰 이슈가 유럽행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고는 싶은데 당장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는 걸 부정할 수 없고, 섣부른 제안은 아닐까 곱씹게 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싶은 느낌.

 

다음날 체크아웃 후 공항에 가기 전 시간이 있어 시장통에서 빵을 사고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다. 십여 년 전 한진중공업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았던 기억을 함께 떠올렸지만, 조선소 맞은 편에 있었던 아파트 단지 말고는 모든 게 새롭기만 했다. 상전벽해라고 말하기에는 이전의 기억들이 너무 흐릿하지만 말이다. 김해공항에서 M과 작별하고 내비의 도움에도 불구 공항 주변을 뱅뱅 돌고 마창대교 전후에서도 드라마틱하게 헤매며 어렵사리 통영에 도착했다. 통영시에 진입한 이후 스스로가 너무 대견해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어, 동호항 방파제에서 과자를 먹는 것으로 부산우중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짧고 굵게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고, 짧게나마 함께 여행할 결심을 말한 여행. 그럼 나 유럽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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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4. 2. 1. 23:23



연초에 터미널에서 극장까지 걸으며 간판 속 ‘통영’ 찾는 게 재미있었는데, 터미널에서 빠져나가는 길에 나도 가끔 가는 마트 이름이 찍힌 가방이 눈에 띄었다. 방금 통영에서 도착한 버스에서 함께 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난 번 기억이 나면서 이번에도 찾아볼까 싶어졌다. 사소하고 자잘한 발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자주 하는 일이긴 하지만 즐거울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이번 ‘통영’은 가방으로 끝. 

1박 2일 동안 6편의 영화를 예매해 일정이 빡빡했다. 첫 번째 영화는 시간상 적당해서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다는 걸 확인하고 큰 기대 없이 선택했는데 무척 좋아서 시작이 괜찮았다. 연초 부산에 다녀온 후에 [나의 올드 오크] 개봉과 함께 켄 로치 특별전이 열렸고, 예전 극장에서 놓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감동적으로 봤던 [지미스 홀]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만 맞춰 또 부산에 가는 건 무리여서 마음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었는데, 연장상영 덕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볼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부국제와 개봉을 통해 켄 로치 감독의 신작들을 다 챙겨 본 터라, 이전에 놓친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고 근작들과 달리 나름 시대극이어서 느껴지는 새로움이 있었다. 마지막 영화는 art2관에서 한 편은 보겠다는 일념으로 택했는데 꽤 좋았던 [조조 래빗]을 생각하면 아쉬웠지만 가벼운 마무리로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 하는 통화가 희한하게 부산에서 이루어지곤 하는 M과, 첫 번째 영화가 끝난 후 간만에 통화를 했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조만간 유럽 등지로 몇 달 여행을 떠날 예정이고 그전 2월에 통영에 오겠다는 연락, 좋아하는 M의 방문도 반가웠지만 못지않게 그의 여행에 혹하고 말았다. “나도 껴줘” 같은 말 안 하고 사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순간의 간절함이 튀어나왔다. 부산에서의 통화는 우연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부산행의 번외 수확 같은 느낌. 실제 가보기 어려운 나라와 도시의 간접 경험에 대한 욕심으로 영화를 선택할 때 배경이 되는 지역도 많이 고려하는 편인데, 촬영지를 찾아가는 여행까지는 어렵겠지만 궁금했던 나라들을 주마간산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레 들떴다. 과연 나는 상반기에 해외여행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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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4. 1. 4. 18:18



12월 중순에 다녀오면서 12월이니까 한 번 더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에 두 번은 좀 찔리니까 영화를 싸게 볼 수 있는 마지막 주 수요일로 잠정 결정했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꼭 보고 싶었는데 마지막 주 수목에 볼 수 있는 회차는 아침 8시대, 고민하다가 연말에 지인도 오기로 했으니 1월에 두 번으로 잠정 결정. 덕분에 연초부터 부산에 다녀오는 길이다.  

게으른 일상을 보내면서도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면 침구나 쓰레기 버리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라, 12월이나 1월에 두 번의 부산행은 특별함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내겐 나름 일관되고 합리적인 결정인 셈이다. 지방소도시민으로서 보고 싶은 영화 놓치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됐지만, 한 달에 한 번 영화 몰아보기는 나름 중요한 의례다. 그마저 귀찮아서 안 하게 된다면 히키코모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일상의 무기력을 환기해주는 영화에 고마워할 일이다. 

차가 생기기 전에는 많이 걸었는데 차가 생긴 후에는 내 운동보다 재작년에 두 번이나 방전됐던 차 운동이 더 급해졌다. 가장 좋은 건 부산에 갈 때 운전하는 거고, 올해는 도전해보려 하지만 아직은 무리. 부산 갈 때 걷기라도 많이 하자 생각하는데 사상터미널에서 서면까지 2시간 이상 걸리고, 영화 보기에도 체력이 필요한 터라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다가 이번에 해봤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후 간판의 통영이 눈에 들어와서 걷는 동안 몇 번이나 마주칠까 했는데 두 번, 괜히 반가웠다. 

도보는 초행이라 지도앱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걸었는데, 절반 이상 버스 노선을 따라가다가 갈라지는 지름길이 새로웠다. 낯선 길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어서 정말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으슥한 대로변 끝에서 마주친 육교가 생각보다 높아 후달렸지만, 건너편으로 넘어가자 곧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잠깐의 걸음으로 마주한 낯익은 길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알고 모르고가 가져오는 마음의 차이를 새삼 느꼈다.  

숙소에 짐을 두고 잠시 쉬다가 영화관으로. 첫날의 두 편은 피아노 연주가 가득한 작품이었는데, 우연한 연쇄였지만 연륜이 극에 달한 거장과 이제 막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청년들의 대비가 느껴졌다. 문화가 있는 날 할인 타임이어서 객석이 제법 찼지만 비매너 관객이 없었던 덕에 편안하게 몰입하며 영화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날 첫 영화는 어차피 선택지가 별로 없었지만 이따금 극장에서 본 스페인어권 영화들이 대부분 좋았기 때문에 선택했는데, 기대보단 그저 그랬다. 보고 싶었던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괜찮았으니 됐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루 두 편을 본 게 뭔가 정갈한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작년에도 달마다 거의 빠짐없이 부산에 다녀왔고 많은 영화를 봤는데 정리에 너무 게을렀다. 스포일러와 홍보 효과 때문에 대부분의 영화 소개에서 시놉시스가 사라졌고, 내용 없이 느낌만 적어두면 나중에는 어떤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기억이 안 나고, 일천한 기억력으로 서사를 되짚어 정리하다 보면 진이 빠지는 악순환이 괴로워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탓이다. 기억이 안 되면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는 성향이긴 해서 또 포스트는 다 만들어뒀는데, 올해는 너무 늦지 않게 정리하면서 지난 것들도 채워보려 한다. 이마저도 안 하면 안 사는 것 같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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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3. 10. 13. 23:23



사상 처음 예매권 구매에 실패해 좀은 시무룩하게 올해 나의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떠나기 전날 시간표를 점검하다가 [사라진 소년병]의 GV 이후 [청춘(봄)]을 보러가는 시간이 애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예매할 때는 들뜬 마음에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전당 8층 시네마테크 퇴장과 cgv까지의 이동 그리고 215분의 러닝타임을 생각하니 첫날부터 뭔가 꼬여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하여 왕빙 감독 영화 한 번 제대로 보겠다고 먹었던 큰맘을 접고 작은 마음으로 9일 저녁 시간표를 살펴보다가 GV가 있는 몽골 영화 [바람의 도시]를 예매했다. 취소수수료 1,000원이 아까웠지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으쓱했는데, 취소하고 보니 9월에 예매한 거여서 맞춰놨던 카드 이용실적에 구멍이 났다. 무척 속이 쓰렸지만 온전히 내 탓이니, 액땜 삼기로. 

 

4박 5일은 길다면 긴 시간이므로 오전에 나름 열심히 집 청소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들을 챙겨 나왔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교통카드가 없어져서 식겁, 다시 집에 올라갔지만 아무데도 없고 비닐 재활용 쓰레기에 쓸려들어갔나 싶어 팔을 걷고 다시 내려왔는데 쓰레기장 앞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5분 내에 마무리된 해프닝이었고 카드를 잃어버린 게 아니니 됐다고 자위했는데 공휴일이라선지 터미널행 버스가 죽어라 안 오고, 택시의 유혹을 어렵사리 떨친 끝에 불안한 환승으로 겨우 시간 맞춰 통영터미널에 도착했다. 4박 5일 동안 얼마나 행복하려고 그러나? 두 번째 액땜.

 

사상터미널에 내려 3시부터 체크인 가능한 숙소로 이동, 예전부터 묵어보고 싶었던 부산도시공사 아르피나. 살펴본 후기대로 연식은 있지만 깔끔하게 관리되어 어제부터 이어진 경솔과 불길의 조짐을 떨칠 수 있었다만, 첫날 밤 가글을 하느라 욕실에서 고개를 젖혔을 때 돔형 천장 한가운데에 바디헤어 한 올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개찝찝함을 느끼며 프런트에 연락을 할까 사진을 찍어둘까 갈등하다가 자정이 넘었고 일단 없애는 게 최선이란 생각에 휴지를 뜯어 변기에 올라가서 직접 제거, 메이드님이 청소하며 욕실 천장까지 확인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만족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졌다. 다음 날을 위해 1시 조금 넘어 불을 끄고 누웠지만 간헐적으로 냉장고 웅웅거리는 소리, 위층 사람의 쾅쾅거리는 소리에 한참이나 뒤척였다. 새벽에는 너무 추워서 잠에서 깨어 온도 제어기 버튼을 눌러봤지만 객실 온도는 중앙관제 시스템인 듯 효과가 전혀 없었고, 7시 30분에는 청하지도 않은 모닝콜이 울려 DND 버튼을 누르고 남은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 날에도 모닝콜은 울렸고 세 번째 액땜은 불필요하므로, 그렇다. 좋은 숙소는 없다는 걸 깨닫는 걸로 타협. 큰맘을 먹을지라도 내가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는 말이다. 

 

아르피나에서 이틀을 묵고 그다음엔 처음 가보는 동네로 숙소를 옮겼다. 센텀시티/영화의 전당과 그나마 도보 이동 가능한 거리의 숙소는 숙박앱에서 광안리나 재송역으로 검색해야 나온다. 2년 전 25만 원쯤의 거금으로 4박을 했던 센텀프리미어호텔 등의 호텔들도 있지만 놀랍게 뛴 물가로 애초에 포기하고, 재송역 인근의 싼 모텔 2박을 미리 예약했다. 역시나, 싸고 좋은 숙소는 당연히 없다. 다행인 건 영화 관람 사이에 돌아가 쉴 수 있는 텀이 없는 시간표였고 밤 11시 넘어 들어가 푹 자고 나오는 게 주목적인 숙소였다는 것. 앞으로 다시 그쪽 숙소를 잡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산책 겸 극장까지 걸어가다가 영화의 전당 너머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며 처음 보는 영화 관련 조형물들을 발견했다. 2010년대 이후 다시 가게 된 영화제는 언제나 영화보기에만 빠졌다가 나오는 시간이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괜히 반가운 느낌. 영화 사이 시간을 보낼 때도 불가피하게 신세계 센텀시티 둘레길 걷기가 많았는데, 다음부터는 다른 쪽으로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개막식을 유튜브 중계로 집에서 보았는데, 무척 상반된 느낌이었다. [다이빙벨] 사태 등의 외압과 나는 알 수 없는 내홍 등을 거치며 어수선해 보였던 영화제가 팬데믹 이후 정상 운영을 맞으며 재도약의 활기를 발산하는 느낌이었던 작년 개막식 분위기를 기억한다. 강수연, 방준석, 장 뤽 고다르 등 세상을 뜬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영상과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깊은 소회가 담긴 듯한 발언이 인상적이었고, 내 삶의 한편에 큰 자리를 차지한 영화와 영화제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간혹 인스타그램에서 지원 예산 삭감에 대한 성명서니 하는 걸 보긴 했고 예매를 하며 상영작과 상영 일정이 줄어든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영화제가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몰랐는데, 영화제 호스트를 소개하는 직함들 뒤에는 '대행'이 붙고 이용관은 부재했다. 궁금해서 찾아본 기사에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영화제 내부의 편가르기며 전횡에 대한 비판, 외부의 색깔론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렇구나, 그런가? 모르는 일에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어쩐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영화제에서 열한 편의 영화를 보았고 폐막식인 금요일에는 cgv서면에서 나만의 폐막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 영화가 시작될 때마다 상영되는 작년과 같은 트레일러가 영화제의 현재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대체로 스폰 운영 스모킹 컨테이너가 놓였던 자리는 부산시가 사활을 걸고 있는 2030 엑스포 조형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북두칠성]이라는 영화를 보러 들어가고 나오는 길에 정성일 영화평론가를 목격해 괜히 반가웠고 서울에서 영화를 보고 그의 열정적인 gv를 들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잠시 돌아봤지만 손 가는 게 하나도 없었던 굿즈샵 컨테이너에는 "Theater is not dead"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바람일까 발악일까, 28회를 맞은 영화제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재작년의 [6번 칸]이나 작년의 [죽은 친구를 구하는 법]처럼 사로잡히듯 좋은 영화는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부고를 마음에 담고 다시 본 [서칭 포 슈가맨]의 인상이 앞선 4일간 본 영화의 여운과 잔상을 압도하는 느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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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12. 30. 20:22



여행페스타 쿠폰으로 테라스룸 숙소 이틀을 일찌감치 예약했다. 제주랑 서울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낯선 곳에서 쾌적한 숙소에 머무는 일에 약간 중독이 됐는지, 주말의 책 모임을 마친 후 집 정리를 대충 해놓고 나서는 연말 나들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숙소 예약을 일찍 해서 연말에 어떤 영화들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cgv서면 아트하우스관 시간표를 확인하며 보여주는 대로 영화를 예매했다. 그러다 보니 꼭 보고 싶었던 영화는 [가가린]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의외로 괜찮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가 있는 날 할인 시간대에 영화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방학을 맞은 학생들 덕에 로비는 붐볐지만 다행히 상영관은 그렇지 않았다. 마리옹 꼬띠아르의 열연과 장중한 대곡 "non, je ne regrette rien"의 압도적인 엔딩이 영화의 산만함과 지루함을 상쇄해준 [라 비앙 로즈]를 보고, 이어 큰 기대는 없이 [크레이지 컴페티션]을 보았는데 의외로 많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페넬로페 크루즈,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함께 출연했으니 실망스럽지는 않겠거니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이야기와 웃음 포인트, 영화의 만듦새까지 너무 깔끔해서 앞으로 스페인 영화를 좀 챙겨봐야겠다 싶은 느낌이었다.

 

쿠폰이 아니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숙소는 쾌적했다. 극장에서 12분쯤 걷는 거리였지만 이제껏 가보지 않은 구역에 위치해 낯설었는데, 동천을 따라 걷는 밤길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불안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영화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세 편이어서 늦은 시각이었지만 여유롭게 배구 중계를 보았다. 이따금 테라스를 드나들며 한심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바로 남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독립적인 테라스라는 걸 절감했다. 언젠가 이런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살게 된다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며칠씩 생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다음 날은 내내 숙소에 머물며 나름 정리하기로 목표한 일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향했다.

 

[가가린]에 앞선 두 영화는 안 봐도 무겁고 지루할 것이 예상되어 살짝 걱정이었는데, [라스트 필름]보다 [메모리아]가 훨씬 대단했다. 전수일 감독의 영화는 따져보니 네 번째 보는 것인데, 의미심장한 제목에 찾아본 기사를 확인하고는 흔쾌한 마음이 되었다. 따로 흔쾌한 마음을 가질 만큼 각별했던 적은 없지만,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젊은 시절 품었던 영화의 꿈을 힘겹게 밀고온 한 사람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달라지기도 했다. [메모리아]는 자자한 명성에 궁금증과 호기심 만큼이나 우려도 적지 않았는데, 나로서는 매우 힘든 영화였다. 긴장과 불안을 한 겹 깔아놓은 분위기도 그랬지만, 내가 뭘 알까마는 후반부의 '저장 장치와 안테나'니 뜬금없이 등장하는 비행체에서는 솔직히 낭패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기대했던 [가가린]이 앞선 두 작품에 눌린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펴준 덕에, 새벽 1시를 전후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어둡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 날의 마지막 영화는 아티스트 무료쿠폰으로 예매한 [코르사주]였다. 연기를 잘한 덕이겠지만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의 비키 크립스가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캐릭터와 동일시한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듯한 영화가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체크아웃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 '본인상' 부고 문자가 도착했다. 지난여름 어느 밤, 통영에 왔다며 느닷없이 연락을 해왔던 이였다. 이주하고 전화기를 바꾸며 대부분의 번호를 지웠고, '모르는' 010 번호는 받지 않는데 부재중 통화가 뜬 후에 또 울리기에 혹시 바뀐 집주인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었다. 집에서 차로 5분이면 가는 곳이었지만 상황도 그랬고 갑작스레 보자는 것도 내키지 않아 나가지 않았었는데, 마지막이었구나. 전 직장 동료와 M에게서도 연락이 왔는데, 황망하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아서 이상했다.   

 

아무려나, 마음 잘 추스리라는 M의 말을 곱씹으며 마지막 영화를 보러 들어갔고 집중했다. 예상대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의 캐릭터가 팔할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였고, 이따금 [스펜서]가 떠올랐지만 그와도 다르게 나로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엘리자베트의 마지막 선택은 파격적이고 전복적이었지만 약간 시원했고, 영화관을 나와 다시 세상에 돌아온 듯 부고와 마음 잘 추스리라는 M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터미널로 향했다. 일 때문이든 마음 때문이든 한때 가깝게 지냈던 많은 이들과 동떨어져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관계나 인연에 대해 갈수록 무의미하고 냉담하게 느끼는 스스로를 감지한다. J형님의 느닷없는 부고에 대해서도 실은 그랬고, 잠시 가봐야하나 생각했지만 조의금만 보내고 말았다. 마음도 정처도 없이, 무기력에 기대어 순간의 편안함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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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12. 14. 21:39

 

2019년 6월 이후 간만의 제주행. 오후 비행기로 들어가고 오전 비행기로 나오는 2박 3일 일정이어서 지구별가게 방문과 지인 K 만남 그리고 비행기 타는 것, 세 가지를 목적과 의의로 정했다. 집에서 터미널까지 시내버스, 통영터미널에서 사상터미널까지 고속버스, 김해공항까지 경전철을 타고 이동해 무려 3천 원을 들여 사전지정한 제주행 비행기의 창가 좌석에 닿았다. 날이 궂은 편이었지만 구름 위로 올라가니 환한 하늘이 펼쳐지기도 했고 제주공항에 내리니 비는 그쳐 있었다. 여행이라기엔 너무 짧고 깨알 같은 계획도 없지만 공항을 벗어나며 마주치는 환영 인사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숙소에 체크인하니 6시가 다 되었고 K에게 연락해 내일 만날 약속을 잡은 후, 주변 산책 겸 저녁으로 먹을 걸 사기 위해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진눈깨비를 맞으며 어둠 내린 거리를 걸어 검색으로 찾은 이후북스 도착, 불은 켜져 있었지만 오픈시간은 6시까지라고 적혀 있어 문 밖을 서성대다가 안에 계신 분과 눈이 마주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동네책방을 꿈꾸었지만 준비하다가 제로웨이스트샵 중심으로 선회한 자로서, 그래도 유심히 서가를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독립출판물들의 글씨는 내게 아주 작아 보였다. 딱히 마음 가는 책이 없었지만 예의상 제목을 들어봤던 한 권을 구입해 나왔다. 

 

상인들과 손님들의 어울림으로 삶의 활력이 가득하다는 재래시장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편인데, 가까이에 유명한 동문시장이 있어 저녁으로 먹을 걸 사기 위해 잠시 들렀다. 각종 음식들이 즐비한 야시장은 상인들과 손님들이 가득해 어수선하고 부담스러웠고, 역시 나는 시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며 그중 만만한 계란말이 전복김밥을 1인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예약한 숙소에는 곳곳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주인이 직접 작업했다고 어디서 본 것 같다. 모텔을 리모델링한 것 같은데 정갈하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고, 조용히 하루 묵기에 괜찮은 느낌이다. 최소한의 계획에 걸맞게, 집에서도 푹 쉬고 있지만 오늘도 푹 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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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2. 11. 30. 22:22



한 달 반 만에 부산에 다녀오는 것으로 11월을 마무리했다. 월요일 오후 서면에 도착, 예약한 병원 두 곳에 들러 유방암과 자궁경부암 건강검진을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봤지만 통영에서는 여의사 찾기도 어렵고 종합병원 외에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서면으로 갔는데,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아이패드 접수에 모두 여의사에 통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세계였고 대기자가 거의 없어서 신기했다. 작년 초 영화 보러 처음 서면에 가서 돌아다니며 어느 구역에 즐비한 병원들을 보면서 신기해했는데 내가 이용자가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밀린 숙제 같았던 검진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접수 때부터 검진 후 의사 상담에서도 은근히 영업스러운 멘트가 이어졌던 게 혹시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라면 통영 이전을 권해드리고 싶어졌다. 유방암 검진하며 불편한 왼쪽 어깨가 대충 바보 상태라는 걸 확인했지만 예상보다 신속하게 건강검진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짜 여행 시작.

 

통영의 병원에서처럼 오래 기다리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첫날 영화는 한 편만 예매했고, 극장에서 멀지 않은 독립서점 겸 제로웨이스트샵에 들르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왔다갔다하던 은은한 몸살기가 느껴지기도 해서 잘한 일이다 싶었고, 숙소에서 좀 쉬다가 어둑해질 즈음 나락서점으로 향했다. 부산 제로웨이스트샵 검색하며 처음 알게 된 곳인데, cgv서면을 그렇게 왔다갔다 하면서도 도보 10분쯤 거리에 있는 그곳을 전혀 몰랐다니 역시 세상은 구석구석 모르는 것투성이다. 나의 목적은 제로웨이스트 제품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여쭤도 보고 예의롭게 적당히 구입도 하는 것이었는데, 작은 책상 하나에 비누바 몇 종류와 양말 정도가 전부여서 약간 당황. 독립출판물이 많이 있어 구경하면서 혹시 통영 관련된 책이 있을까 찾다가 사장님께 여쭤봤지만 없었다. 하여 나락서점의 환경 글쓰기 모임 기록이라는 책 [지구연대기]와 동백오일과 지게미가 들어간 비누바를 사서 나왔다. 

 

첫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살펴볼 때 궁금했었는데 바로 개봉하니 반가웠고, 매우 좋았다. 몽글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으로 상영관을 나오니 월드컵 한국 경기 중계를 보러왔는지 로비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숙소에 가느라 지나는 서면 유흥가 골목에도 활기가 돌았다. 다음 날 첫 영화가 9시 30분인 관계로, 도착해서는 바로 씻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다정한 여행메이트 타이레놀pm의 힘을 빌어 자정 넘어 잠을 청했다. 어지간해서는 8시 전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좀 걱정했지만 잘 일어났고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 속에 길을 나섰다. 보도에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고 떨어진 은행잎들은 끝물의 가을을 전하는 느낌, 한산한 거리를 걸어 극장으로 향하는 아침 기분이 꽤 근사했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도 부산국제영화제 때 시간이 안 맞았던 영화, 엄근진 모드의 소개 때문에 약간 긴장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이어 [파이어버드]를 보고 숙등역 인근의 천연제작소 부산점으로.

 

온전한 제로웨이스트샵은 처음이고 사사로운 목적도 있는 방문이어서 계단을 올라가며 살짝 숨을 골랐다. 가게에는 직원분만 계셨는데 부담없이 편안하게 맞아주셔서 통영에서 제로웨이스트샵을 준비하려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찾아왔다고,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는지 먼저 여쭤보고 염치없을 만큼 제품들의 사진을 엄청 찍었다. 이십여 분 꼼꼼히 둘러보고 바구니에 살 물건들을 담아 계산대로 갔더니, 보시면서 궁금한 거 없으셨냐고 뭐든 물어보라고 하시길래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때부터 직원분이 매대마다 머물며 제품과 제작업체에 대한 설명부터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폐를 끼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섬세한 친절함이 정말 고마웠고, 일단 내가 써봐야지 싶어 주섬주섬 고른 물건들의 총액이 내 생일 날짜에 00을 붙인 숫자여서 괜한 의미 부여에 한몫했다. 감사한 마음에 가방에 있던 달고나초코바와 젤리를 드리고, 가게 오픈 준비 본격적으로 할 때 다시 인사드리기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당연히 여전히 막막하지만, 친절한 직원분 덕분에 두터운 장막 한 겹이 환히 벗겨진 기분이었다.

 

다시 극장으로 돌아가 [존 덴버 죽이기]를 보고 숙소로 향했다. 시간상으로는 영화 한 편 더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마땅히 볼 영화가 없기도 했고, 하루 네 편은 이제 정신력과 체력이 못 따라주니 어쩔 수 없었다. 숙소는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머물렀던 테라스가 있는 곳, 여행페스타 쿠폰 덕분에 이번에도 거의 반값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테라스였는데, 프론트는 매우 친절했지만 지난 번에도 이번에도 내부의 청결도가 매우 떨어졌다. 심지어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 커버를 열자 작은 바퀴벌레가 나와서 식겁, 다행히 휴지 둘둘 말아 변기에 떨어뜨리고 물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을 했는데 잠을 청하려니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이벤트 쿠폰 없으면 예약하기 어려운 금액이니 다시 갈 일 없겠지만, 혹여 그런 기회가 있어도 다시 가지 않을 곳이 되었다. 

 

마지막 날의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본즈 앤 올]. 일반관 무료 쿠폰이 있었고 그 시간대에 볼 영화가 그것뿐이어서 애니메이션도 뮤지컬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믿고 선택했는데, 피노키오를 보며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페토가 피노키오 만들었고 거짓말 할 때 코가 길어진다는 것 말고는 원전의 사건이나 줄거리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푹 빠져서 보았고 마음이 시큰해졌다. [본즈 앤 올]은 부산국제영화제 때 추가 상영 소식을 들었으나 아침이어서 포기했었는데, 공포영화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티모시 샬라메 때문에 용기를 냈다. 본 게 거의 없지만 보통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전면에 내세운 설정의 도착성 때문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어 번은 눈을 내리깔아야 했고 양 옆에 바로 관객이 있었던 터라 무거운 가방을 안고 보느라 몸과 마음 모두 쉽지 않았다. 티모시 샬라메 덕에 이런 영화를 다 보네 생각했지만, 표면적인 서사 뒤에 가려진 의미를 곰곰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로비에 사람이 적지 않았다. 12월까지가 기한인 매점 무료쿠폰이 2개 있고 나는 쓸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을 잠시 살피다가 교복 입은 여학생 셋을 찾았고, 좀 놀란 듯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어서 그중 한 명과 키오스크 앞에 가서 콤보와 팝콘 주문 완료. 영화 재밌게 보시라 인사하고 극장을 나왔다. 6시 50분 통영행 버스는 기사님의 예술운전으로 69분 만에 터미널 도착, 부산을 오가며 수십 번 버스를 탔는데 최단시간이었던 것 같다. 귀가길에는 버스를 두 번 타야 했지만 121번을 탄 덕에 강구안을 지나왔다. 집에 오니 꽤 피곤했지만 11월이 다 갔다는 생각에 후련했다. 숙제처럼 여기던 일들을 잘 마쳤고, 여섯 편의 영화 중 다섯 편이 꽤 좋았으니 아주 성공적. 12월부터는 여섯 달 동안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 홀가분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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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