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겨울 프랑스의 안시, 낯선 도시로 이주한 젊은 부부와 어린 두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집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외출에서 돌아온 젊은 엄마가 옅은 웃음기를 띤 얼굴로 현관에 들어서고 장난꾸러기 아들들은 카메라를 주시하며 귀여움을 발산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유행에 맞게 꾸며졌을 쾌적한 인테리어는 이제 막 부르주아의 일상에 진입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평범한 주부의 모습인 아니 에르노는 아직 글쓰기의 열망을 품고 문학 교사로 일하는 여성, 그 집에는 딸의 사회 생활을 지원하며 손주들을 돌보는 엄마도 함께 살고 있다.
좌파 성향 인텔리인 부부는 그해 칠레 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모네다궁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사회주의 개혁을 진행하던 시기, 가난하지만 평등한 발전을 지향하는 나라의 곳곳을 둘러보고 먼발치에서 잠시 그를 목격한 일은 다음 해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역사적 순간을 통과한 강렬하고 애잔한 기억이 된다. 프랑스의 중산층 가족들에게 여름의 긴 휴가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나는 여행은 당연한 일상이다. 아니 에르노는 남편의 출장길에 동반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일도 즐겼던 듯하고, 덕분에 홈 비디오는 1970년대 여러 국가와 지역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포착해 보여준다.
가족은 남편 필립의 누이가 살고 있는 아르데슈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며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옛 현무암 건물이 즐비한 마을에서 전기도 없는 자연친화적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기도 하고, 필립의 부모가 살고 있는 어느 농장에서 미니골프를 즐기며 다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공산주의 정권의 감시가 삼엄한 알바니아, 프랑스 제국주의의 흔적이 여전한 모로코, 스페인 곳곳과 영국, 다큐에 마지막으로 담기는 1981년의 모스크바까지 부부 혹은 가족 단위로 여행은 이어진다. 그사이 화면 속 아이들은 성장하고, [빈 옷장]으로 데뷔해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로 펴내기 시작한 아니 에르노에게는 자신만이 기억하는 집필에의 강박도 투명한 레이어처럼 겹쳐진다.
슈퍼 8mm 카메라를 장만해 홈 비디오를 찍기 시작할 때 화면을 채웠던 단란한 가족의 모습,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피사체를 향한 애정 가득한 시선은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서서히 변화한다. 아니 에르노가 19살에 6개월간 오페어로 살았던 영국 여행 영상에서는 부부간에 흐르는 권태와 불화의 조짐이 확연히 드러나고, 유쾌하지 않았던 과거의 시간에 대한 내레이션과 나란히 흐른다. 꼬마들이 어엿한 소년으로 자라는 사이 부부는 조금씩 멀어졌고 다음 해 파경을 맞았다. 카메라는 남편이 아이들의 양육과 촬영본과 영사기는 아내가 갖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촬영한 홈 비디오를 함께 보기 위해 여러 권의 책으로 수평을 맞추면서 기대로 두근거리던 시간, 가족의 행복을 상징하는 듯한 기다림의 시간은 그렇게 끝을 맞았다.
가정 내에서 “양육자, 침묵의 관리자”였던 아니 에르노는 [얼어붙은 여자] 출간 이후 불화가 고조되었다고 회고한다. 남편과 헤어지며 홈 비디오와 관련한 물건을 나눈 것에 대해서는 “기억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그 결과 40년이 지나 짧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다큐가 만들어졌다. 아니 에르노의 내레이션은 영상으로 남은 흔적이 소환하는 기억과 현재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덧붙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도 냉정하게 객관화한다. 삶에 대해서도 필름에 대해서도 이후의 운명을 상상할 수 없는 시간들이 흘렀고, 촬영 당시와 다큐 작업 과정의 수십 년 시차는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보여준다.
상영 정보를 보고 많이 궁금했는데, 예매 후 영화제를 기다리는 사이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신기했다. [단순한 열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선물을 받아 읽었었는데, 무려 20년 전이다 보니 중년 여성의 심리에 별로 공감할 수 없었고 나름 옛날이다 보니 자신의 불륜 경험을 세세히 기록했다는 사실도 낯설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읽은 그의 책은 없고 [사건]을 영화화한 [레벤느망]을 보며 뒤늦게 관심이 생긴 터였다. 정보에 따르면 아니 에르노는 이 영화를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1968년 이후 10년 동안의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 소개했다는데, 그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고 내밀한 또 하나의 레퍼런스를 만나는 기분일 것 같다. 작가와 작품 세계를 잘 모르는 내게도, 한 가족의 10년을 통해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삶의 여러 면모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던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27th Biff
10/13 CGV센텀시티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