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습으로 대다수 이웃들이 떠난 포위 지역, 아빠 모타즈와 엄마 할라 그리고 막내딸 제이나는 외벽 일부가 허물어지고 수도도 전기도 끊긴 집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공습은 진행형이지만 모타즈에게는 평생 일군 집을 떠나는 것도 난민이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정비사였던 그는 집안에서 전기를 생산하려 기계에 매달리고 말통을 들고 나가 물과 식료품을 구해 돌아오곤 한다.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모타즈의 완강한 의지와 노력에 호응하면서도 할라의 마음에는 불만이 쌓여간다. 물정 모를 나이는 아니지만 제이나는, 너스레를 떨며 가족의 불안을 달래는 아빠를 거스르지 않는다.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며 집을 떠나라는 경고에 이어진 공습에 제이나의 집도 참혹하게 파괴된다. 거리로 난 벽은 골조만 남긴 채 전면창처럼 뚫리고 부서져내린 흙더미와 먼지로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현관문 옆 벽이 무너지며 또 다른 문이 생겨나고 제이나의 방 천장에도 휑하게 구멍이 났다. 그럼에도 조금만 손 보면 된다는 모타즈의 아집은 흔들림 없고, 외부를 향해 뻥 뚫린 공간마다 커튼처럼 걸어둔 커다란 천은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아직 떠나지 않은 극소수 중 하나인 소년 아메르가 천창처럼 뚫린 천장을 통해 제이나에게 다가온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둘은 각자 다른 이유로 포위 지역에 남았고, 만났다. 아메르가 내린 밧줄을 타고 옥상에 오른 제이나는 오랜만에 집안을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만끽한다. 전자기기를 잘 다루고 수완이 좋은 아메르는 포위 지역 곳곳을 촬영해 영상으로 전송하고 위성 전화도 사용한다. 외부와 오래 차단된 상태였지만 사람이 죽는 영상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제이나에게 아메르는 말한다. “사람이 안 죽는 시리아 영상은 없어.” 이후 아메르는 차로 7시간이 걸렸던 가족 여행에서 담은 마다가스카르의 바다를 제이나에게 보여주고 묻는다. “전쟁이 끝나면 뭘하고 싶어?” 제이나는 낚시를 하고 싶다. 낚시는 남자의 일이라는 아메르에게 제이나는 말한다. “두 번째 아빠는 필요 없어.”
포위 지역은 날이 갈수록 위험해진다. 전사와 결혼시킨 후 안위를 알 수 없는 딸을 걱정하던 할라는 아메르 덕에 어렵사리 통화를 시도하고, 즈음 언니들의 결혼을 중개했던 이가 찾아와 제이나의 결혼을 제안하자 폭발한다. 영화 초반에 제이나의 생리를 비밀에 붙였던 할라의 내면에는, 전쟁과 차별로 결혼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여성의 운명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다. 자신은 거부하지 못했고 사랑하는 딸들도 그랬지만 막내딸 제이나만큼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는 할라의 마음은 모타즈와 헤어져 떠나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이슬람 가부장으로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모타즈는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지니고 있던 총을 꺼내 겨누기까지 하지만, 할라는 제이나와 함께 집을 나선다.
폐허가 된 마을은 낯설고 아이들의 물건이 그대로인 채 텅빈 학교도 위험하다. 포위 지역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헤매는 가운데 모타즈의 추격도 따돌려야 하는 모녀의 머리 위에 어디선가 드론이 날아들고, 아메즈가 모습을 드러낸다. 떠날 사람은 다 떠난 마을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을 인도해주는 사람 역시 아메즈다. 폐쇄된 듯 보이는 터널을 어렵사리 통과해 겨우 당도한 땅 위에서 길목을 지키던 방위군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위험에 처하지만, 다행히 그는 세 사람이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포위 지역을 빠져나가는 낡은 트럭을 모타즈는 용케 뒤쫓아왔다. 멀리서 달려오며 간청하는 아빠를 발견하고 트럭에서 내려 달려간 제이나, 모타즈는 마침내 총을 던져버리고 말한다. “당신과 함께하면 난민도 되겠어.”
시리아 내전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 관객에게도 영화는 낯설거나 어렵지 않다. 공습이 진행되는 포위 지역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그곳에 남은 몇 사람을 주요 인물로 하는 영화는 이슬람 사회의 여성 차별과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전달한다. 자극적이거나 작위적인 연출이 거의 없어서 앵글과 별개로 구멍난 벽과 창을 통해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느낌도 들었다. 의외로 군림으로만 일관하지 않고 제이나밖에 없는데도 늘 “얘들아 Girls!” 라고 딸을 부르는 모타즈를 보며 '전사와 결혼시킨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딸들'을 생각하는 그만의 습관일까 싶었다.
모타즈는 여러 모로 답답한(?) 인물이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난민이 된다는 것'에 대해 가장 강력히 환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억지스러운 고집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생존을 위협하는 불가항력에 대한 개인의 불가피한 선택이 집단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니 말이다.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행에 옮기는 할라 그리고 비이슬람 사회의 또래 소녀와 다를 바 없는 제이나의 일상적인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공습, 여성에 대한 차별이 내면화된 언행과 관습이 횡행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행형의 공포가 살아 있는 작품이다 보니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특유의 순수한 분위기가 미덕처럼 곳곳에 녹아 있는 점이 좋았다. 뻥 뚫린 벽과 창문 밖으로 한없이 펼쳐진 하늘로 던진 돌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어 사라지는 장면이나 부서진 창틀 밖에 어느새 자리한 비둘기는 잠시나마 참혹한 현실을 가려주는 동화적 아우라를 선사하는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어떤 복선이나 암시도 없이 담담히 이어가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현실과 그럼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마음속 바람을 잊지 않고 나누는 모습, 마침내 다른 세계를 향해 함께 떠나는 모습에 마음이 밝아지고 조금은 안심이 됐던 것 같다. 극장에서도 상영된다면 좋을 것 같다.
27th Biff
10/13 롯데시네마센텀시티 8관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 2022.10.14 |
---|---|
[칼날의 양면] (0) | 2022.10.13 |
[슈퍼 에이트 시절] (0) | 2022.10.13 |
[세일즈 걸] (0) | 2022.10.12 |
[자기만의 방] (0) | 2022.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