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10. 13. 23:33



장과 사라, 사라와 프랑수아. 거두절미하고 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며 미세한 변화와 극적인 균열 그리고 그 자체의 모순에 집중하는 영화였다. 첫 장면은 어느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는 장과 사라, 이어 휴가에서 돌아온 아파트에서도 그들은 이제 사귀기 시작했나 혹은 뭐 찔리는 게 있나 싶을 만큼 서로에게 신경쓰며 애틋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다. 비가 내리니 데려다주겠다는 장의 제안을 물리고 지하철로 출근하던 사라는 거리에서 젊은 여자와 함께인 한 남자를 목격한다. 흔들리는 시선과 심상찮은 표정의 사라는 직장에 도착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한다. 그 시각 장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 집에 들른다.

 

장과 사라는 9년차 커플, 장은 전직 운동선수로 사연을 알 수 없는 수감 생활을 거쳐 현재 실업자이고 사라는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장에게는 고령의 어머니가 버겁게 양육 중인 전 아내 사이에 낳은 아들 마르퀴스가 있고, 사라는 조금 전에 10년 전 헤어진 전 남편 프랑수아를 목격했다. 늙은 어머니에게 맡긴 사춘기의 마르퀴스는 자주 문제를 일으키고, 스포츠 스타에서 전과자가 되고 백수 처지인 현실도 장에게는 숙제다. 도입부에서 의아하리만큼 넘치는 혹은 불안을 무마하기 위함인 양 사랑의 느낌을 연출했던 장과 사라의 관계와 온도는 프랑수아의 출현과 함께 서서히 벌어지고 차가워진다. 

 

프랑수아는 장에게 스포츠 에이전시 사업을 제안한다. 전 남편과의 동업을 상관없다며 동의한 사라가 얼마 전 그를 보고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사정을 장은 모른다. 마르퀴스의 질풍노도가 시시때때로 발목을 잡는 가운데 장은 프랑수아와 함께 일을 진행시키고, 커플 앞으로 한결 전진해 다시 만난 프랑수아와 사라는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내면에 물결이 일 때마다 콘트라베이슨지 첼로인지의 느린 선율이 노골적인 복선처럼 깔리고, 내내 수상한 기운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인물들의 상태는 기복을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며 보였던 장과 사라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권태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라와 프랑수아는 너무 쉽게 몸과 마음을 연다.

 

장에게는 가족 문제가 지뢰밭처럼 깔려있고 사회적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낮은 자세로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라와의 관계도 마뜩지 않다. 장을 속이며 위태로운 만남에 빠져든 사라는 어느새 세상 가장 가련한 여인이 되어 프랑수아의 문자를 기다리던 새벽,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쩌고 하는 독백을 내뱉는다. 감독의 의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큰 진폭으로 변화하는 감정만을 따라가며 공감하기에는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전사가 빈약하게 느껴진다. 장의 일상을 뒤흔드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인 마르퀴스를 흑인 혼혈로 설정하고, 사라의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를 통해 프란츠 파농과 인종차별주의를 거론하는 등 세 주인공 이외의 인물과 상황에 대해 마련한 장치도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엔드크레딧의 쿠키 영상 속에서 흐르던 장과 마르퀴스의 새로운 삶과 화해마저도 살짝 뜬금없게 느껴졌다면, 내가 너무 삐딱한 걸까.

 

솔직히 말하면 뱅상 랭동과 줄리엣 비노쉬를 주연으로 영화를 이렇게 찍을 수 있다니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설득력 없이 급발진하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고, 커플이 다투다가 욕조에 폰이 빠지자 이어지는 "아무것도 없어요." 였나 하는 대사에서는 설마 중의적인 상징인가 싶어 민망해졌다. 감독의 작품은 [렛 더 선샤인 인]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름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이입이 참 어려웠고, 특히 사라 캐릭터의 오버스러움이 당황스러워서 배우는 순순히 수용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선택한 이유는 오직 뱅상 랭동이었지만, 올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과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영화라니 안심했는데 내게는 정말 기대 이하였다. 크리스틴 앙고의 [삶의 모퉁이]가 원작이라는데, 인물의 감정과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었다면 영상화에 실패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감독이나 주연 배우 중 한 사람이라도 내한했다면 큰 뉴스가 되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제작자나 주요 스태프가 참여할 예정이었을까 싶었던 GV의 취소 안내를 보고 살짝 김이 빠졌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대로 진행되었어도 조금 민망했겠다 싶었다. 시작 전 뒤쪽 객석에서 감독 이름을 거론하며 기대에 차 떠들던 젊은 남성의 큰 목소리는 영화가 끝난 뒤 실망감이 어린 상태였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옆 객석에서 당황스럽다는 말이 들려왔다. 엄청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웰컴]과 [앳 워], [티탄] 같은 영화를 보며 믿음과 호감을 갖게 된 뱅상 랭동 아저씨가 나오는 작품을 나의 올해 부국제 마지막 영화로 볼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았다.   



27th Biff 
10/13 영화의전당 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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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