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달리는 택시 안,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주시하던 여성이 차에서 내려 한 아파트로 들어간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앱 광고를 보고 찾아온 집이다. 한 달 후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할 계획인 그는 6개월이라는 계약 조건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난처하지만 당장 다른 방을 구할 수 없으니 나갈 때 새 룸메이트를 찾아주기로 하고 머물기로 한다. 여성의 이름은 티나, 방을 내어준 여성은 메기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메기는 잘하는 영어로 콜센터 재택근무를 하면서 미국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가녀린 체구에 과민한 상태가 되면 의식을 잃곤 하는 약한 체력이지만, 담배와 술을 달고 살며 친구들과 파티를 할 때면 대마초와 마약도 마다 않는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는 메기는 조지아의 현실이 답답하고, 뉴욕은 머나먼 자유의 해방구다. 미국 비자가 나올 때까지 메기의 일상에는 잦은 일탈이 함께할 것 같다.
단출한 짐으로 임시 거처를 찾아온 티나의 속사정은 복잡하다. 결혼 생활이 불행했고 남편의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 남편과 싸우다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았고 남편은 감옥에 갔다. 남편의 어머니에게 티나는 자식 팔자 망친 나쁜 여자고, 자신의 어머니 역시 딸의 편이 아니다. 남자친구 베카와 함께 살기로 하고 고향을 떠나 트빌리시로 왔지만 그는 지금 멀리 있다. 유일한 기댈 언덕이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고 통화가 되어도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일찍 결혼해 사회 생활 경험도 없어 보이는 티나는 무일푼 신세다. 남편과 함께 살던 옛 집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물건을 빼내 월세를 충당하고 이를 알아챈 남편의 어머니는 전화로 저주를 퍼붓는다. 와중에 티나를 찾아온 베카는 둘의 관계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한다. 사랑 하나 믿고 낯선 도시로 떠나온 티나는 혼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동거는 데면데면하게 시작되었지만 서로의 다름이 의외의 보완 지점이 되며 시간이 흐른다. 차주전자도 없고 음식을 해먹는 일도 거의 없는 메기와 달리, 티나는 옛 집에서 챙겨온 차주전자로 차를 끓이고 직접 사온 채소를 손질해 뜨끈한 수프를 끓인다. 집을 드나드는 메기의 친구들은 개방적이고 친근한 태도로 내성적이고 방어적이었던 티나의 마음을 아주 조금씩 열리게 만든다. 줄담배를 피우고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만취한 파티 다음 날 쓰러져 있곤 하는 메기에 대한 티나의 거리감과 거부감도 서서히 줄어든다.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친구가 되고 티나는 메기의 친구들과도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날 티나는 동생으로부터 어머니가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먼 길을 함께한 메기와 친구 덕분에 장례식장에 찾아가지만 티나는 아버지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난다. 줄줄이 닥치는 나쁜 상황을 감내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티나는 오열하고, 메기는 곁에서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짧은 시간을 함께하며 깊이 마음을 열게 된 티나와 메기는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다. 분위기에 취한 실수라거나 동성애나 양성애 같은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우정과 사랑의 교감으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하룻밤 이후 달라진 것은 상대를 향해 다정함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과 이해와 위로의 당사자로서 더욱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분방한 일상을 보내며 자유를 열망하는 메기와 난마처럼 얽힌 문제들과 힘겹게 맞서고 있는 티나, 둘은 많이 다르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용기를 냈다는 점이 닮았다. 의기소침하고 적극성이 없어 보였던 티나는 언젠가 쇼핑하며 눈여겨 본 캐셔일을 얻어 경제적 독립의 기반을 마련한다. 얼마 후 메기는 고대하던 미국 비자를 얻어 떠난다. 두 사람이 살던 집 앞에 당도한 낯선 여성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마지막에, 메기가 그랬듯 새로운 룸메이트를 맞이하며 현관문을 여는 티나의 얼굴을 비춘다.
9일과 10일 상영에는 있었던 GV는 없어 아쉬웠지만, 영화 시작 전 감독의 메시지를 담은 짧은 영상이 상영됐다.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 친구들과 저예산으로 찍은 영화이고, 티나 역을 맡은 배우가 공동각본으로 참여해 부족한 부분이 채워졌으며, 독일의 공동제작자 덕분에 후반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자기만의 방'은 거의 100년 전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책 제목,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성의 주체적인 삶의 조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문장이다. 영화는 '자기만의 방'을 공유한 티나와 메기를 통해 동시대 조지아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전환기를 잔잔한 드라마로 보여준다. 티나의 전사가 서서히 드러나는 방식과 다른 개성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녹아드는 과정이 좋았고, 우연한 만남과 한시성을 전제로 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의미와 확장의 가능성도 새롭게 다가왔다. 조지아 영화여서 선택했는데 실내 촬영분이 많아 도시 배경을 별로 볼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레이스커튼을 통과해 비추는 햇살의 질감이 느껴지는 그들의 아파트가 어느새 친숙한 공간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영화들이 이미 존재할 것도 같지만 나라마다 당대 젊은 여성들의 현실을 담은 [자기만의 방]이 제작된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7th Biff
10/12 롯데시네마센텀시티 7관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슈퍼 에이트 시절] (0) | 2022.10.13 |
---|---|
[세일즈 걸] (0) | 2022.10.12 |
[리턴 투 서울] (0) | 2022.10.11 |
[성덕] (0) | 2022.10.09 |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0) | 2022.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