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적인 책의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이라크전 발발 즈음 <전쟁에 반대한다>가 출간된 후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의 인터뷰를 읽은 일이 있다. 인상 좋은 노교수의 이야기는 희망적이고 흥미로웠다. 올바른 관점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가 같은 세계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고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하워드 진은 자신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펼쳐보여준다.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2차 대전과 베트남전 등의 굵직한 현대사의 극적인 순간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경험한 하워드 진의 인생은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만나서 변화하고 상승하는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는 부모 밑에서 빈민가를 전전하던 어린 시절이 그를 반골기질이 다분한 청년으로 키웠고,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인류애적인 명분과 사명감으로 참전을 결정한다. 광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청년의 혈기는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을 결정짓는 반성의 계기가 되어주었고, 대학에 진학하고 교수가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의 방향은 주저없는 직진이다.
곳곳에 산재하는 희망의 불씨들을 돌보고 피우는 일은 마음 속에 담은 기대와 바람 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하고 또다른 나와 연대해야 하고 또한 끊임없어야 한다. 하워드 진은 자전적 역사 에세이라 명명된 이 책에서 담담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2차대전과 미국 남부의 민권 운동, 베트남전 반대 운동 그리고 그 이후를 회고한다. 격동의 물결을 따라 급박하게 변화하는 역사의 중심에서 좌파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그의 이력은 꽤나 묵직하고 현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여유와 유머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평범해서 오히려 아름답다.
며칠 전 일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 책의 첫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래저래 나 좋은 것을 좇아 살다가 서른이 되었고, 20대 중후반을 지나며 개인사의 언덕에서 힘겨워하면서도 차마 내 사는 세계의 어둠과 그늘에 대한 연민과 사회 일원으로서의 작은 책무에 등돌리지 못하는 어정쩡함이 늘 삶에 배어있었다. 인생의 한 고비를 일단락짓고 나는 지금 새로운 시작의 경계에 서있고, 그것은 투철하지는 못했지만 학창 시절 내가 꿈꾸던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이다. 그 시작을 축복하는 선물처럼, 그의 삶만큼이나 일관되게 감동과 환희로 독자를 고양시키는 아름다운 책이다.
당장 보이지 않고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세상 곳곳에서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잠재력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마침내 그들이 일어섰을 때 경이롭게 일궈지는 하나의 변화에 대한 감동을, 그는 이제껏 목도했고 단호히 희망한다. 거꾸로 가는 혼돈의 세상에서 희망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는 그의 메세지는, 역설적이지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그야말로 희망적인 전언이다.
2003-08-07 04:17,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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