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19


10여년 전쯤 읽었던 '개미'는 상상력 제로에 과학적 사고에 있어 심할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 내게도 꽤나 흥미진진한 독서였다. 이후 연달아 출간된 독특한 저작들과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주문과도 같은 재미있는(?) 이름 그리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재기어린 눈동자를 빛내는 그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우리들에게 친숙해졌고 마치 귀화한 외국 연예인의 그것만큼이나 흔해져버렸다. 하지만 각종 지면을 범람하는 베르베르를 난 10년 간 외면했다. '뇌'니 '타나타노트'니 하는 묵직한 제목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도 같고, 꽤 재미있기는 했지만 '개미'로 충분히 복잡했던 나의 뇌는 차마 그를 감당해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같다. 태생의 스케일이 무척 협소하고 편협한 편인 나는, 서른을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작고 사소하고 미시적인 관점으로 세상 모든 것에 반응하고 사고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글도 대체로 온갖 일상의 소소한 떨림과 자잘한 반향들을 섬세하게 다루는 것들이다. 

'나무'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보통명사이자 물적 대상이다. 이 책을 집어든 건 그러니까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감이 느껴지는 블루톤의 책표지와 정감이 가는 재생용지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꽤나 마음에 드는 조우의 한 이유였다. '나무'를 읽으며, 얼마만인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에 범우주적인 세계 속 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사람마다 타고난 사고의 범주가 있다고 일찌감치 단정짓고 살고는 있지만, 이렇게나 분방하고 자유롭게 그 어떤 한계에도 구애받지 않고 상상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부러웠다.

물론 문화 지체가 일종의 현실태가 되어버린 문명의 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미래의 문제는 개인을 넘어 인류 전체의 문제로써 집단적인 궁금증과 환상을 자아내는 영역이며, 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혹은 의심에 착안한 무척이나 기발한 발상의 작품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갖은 문화 예술 작품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글쓰기가 한 해의 최고의 책으로까지 선정되는 것은 좀 넘치는 찬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무'에 실린 열여덟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대체로 하나의 주제를 일관성 있게 관통하고 있다. 일반적 인식 너머에 있는 그 어떤 우월한 존재로부터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향을 받고 있는 군상들의 묘사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풍자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중심적 존재를 자임하는 인류의 오만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며,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공적이고 사적인 억압 기제들과 갖은 편견에는 씁쓸한 비소를 날린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매트릭스'니 '반지의 제왕'이니 '지구를 지켜라'니 하는 범우주적인(?) 미래 영화들이 떠오른 것은, 담론의 소재로 삼은 대상의 교집합적인 요소와 더불어 이 작품들이 인류에 던지는 메세지의 유사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미래는 갈수록 예측 불허로 치닫고 있는, 또 하나의 세기말을 넘어선 오늘의 우리에게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조금은 황당한 상상이라 할지라도 꽤 설득력을 지닌 우화다. 경쾌한 사고와 간결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책 속에 나오는 '가능성의 나무'처럼, 끝을 모르는 무한 질주에 경도된 인류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우주의 모든 생명과 공생할 수 있는 겸허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거운 독후감일까.


2004-01-23 22:52, 알라딘



나무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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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