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몰랐지만, 2003년과 2004년은 이주노동계에 큰 변화가 불어닥친 분기점이었다고 한다. 2003년 봄 안양으로 이사를 한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꿈(?)을 조심스레 꺼내 쓰다듬으며 첫 외출을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아가 자원활동을 하고 싶다고, 정말 뻘쭘하고 멋적었지만 정말 그러고 싶어서 용기를 낸 참이었다. 무시 당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를 맞은 분은 통역 능력이나 노무 혹은 법무 지식 같은 어마어마한 전문성을 이야기하며 마지못한 듯 자원활동 신청서를 내어주셨다.
허탈하고 좀은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온 나는, 괜시리 열적고 민망한 마음에 얼마 후에 있다는 자원활동가 오티를 가지 않았고 곧 다른 단체에서 일하게 되면서 자원활동은 아주 먼 일이 되었다. 그해 겨울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열린 행사에 다녀오는 길, 무척 긴박한 느낌이 드는 강제추방 반대 유인물을 받아들고 지하철에서 한참을 읽으면서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당장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정말 잘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죽음들을 뒤늦게 확인하며 내가 가진 낭만적 대상화가 많이 머쓱해졌었다.
이 소설은 그런 험상궂은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랑을 찾아 네팔을 떠나 온 이주노동자 카밀과 가난으로부터 내몰려 한국에 온 사비나 그리고 미국 이민 생활에서 받은 유년기의 상처로 그늘 지고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던 여인 신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긴 이야기다. 저자는 2003년 11월 11일, 지하철 선로로 뛰어든 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를 텔레비전 뉴스에서 목격한 후 소설의 연재를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강제추방 위기에 몰린 이주노동자들이 불안한 짐승처럼 쫓기던 끝에 줄을 이은 죽음의 행렬, 그 시작이었다.
소설의 기둥을 이루는 줄거리는 카밀과 신우의 만남 그리고 카밀과 사비나의 재회를 둘러싼 이야기다. 철없는 양아치로 청소년기를 보내던 중 운명적인 사랑으로 이끌린 사비나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카밀이 겪은 험난한 이주 노동의 개인사,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소녀가장 사비나가 한국에 와서 온갖 부조리한 상황에 내몰리며 경험하는 '돌아버릴' 것 같은 자잘한 사건의 일상들 그리고 '세상이 화안해요'라는 낯선 청년의 한 마디에 사로잡혀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모성애를 느끼고 삶의 안온함과 생활의 질곡에 빠져드는 신우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이름 있는 신만도 삼 천이 넘는 가난하지만 정신의 풍요로움을 가진(혹은 가졌다고 믿고 싶은) 네팔의 신비롭고 도저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중반 이후부터는 당시 급박하게 몰아닥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주인공 카밀과 사비나 뿐 아니라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사건을 망라한 에피소드로 생생히 전해진다. 특히 고용허가제 도입 시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상황과 단속추방에의 대응, 차례로 목숨을 잃은 열 한 분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공 세 사람을 둘러싼 감정선과는 다른 톤으로 마치 르포처럼 고발된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선지(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다시 손을 보았겠지만) 부분부분 이야기가 끊어지는 감이 없지 않고 어쩌면 난삽하달 정도로 여러 가지 층위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펼쳐지지만, 한편 각별한 마음으로 읽다보니 꽤 여러 방면의 미덕을 가진 작품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 세 사람의 삶과 사랑, 운명이 짜임새 있는 구성과 묘사로 이어지고, 네팔 혹은 소위 문명의 발전을 이루기 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생과 사를 넘나드는 믿음과 세계관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한편 이 땅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대다수 그들의 삶을 소재로 삼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매우 집요하고도 성의 있게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주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하는 우리조차도, 이따금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경시하거나 미화하고는 한다. 이는 단지 이주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일수록 그런 편견은 강하게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긍정적일 때조차도 그들을 마냥 선하거나 약한 존재로 인식하고 동정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게 아직은 우리의 수준이라고 생각되는데, 작가가 선택(?)한 입장은 그저 이주노동자들의 편에 서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편에 섬으로써, 그들의 투쟁과 사랑과 삶의 내밀한 구석을 살피고 그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이 꾸었던 꿈을 눈물겹게 그려내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문명 이전의 초자연적인 정신 세계와 그런 무구함을 간직한 네팔에 대한 저자의 애착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의 2세 이야기로 급속히 뛰어넘은 소설의 에필로그는 너무 싱겁고 작위적인 마무리란 느낌이 들었다. 부분부분 편차는 있지만 작품은 비교적 팽팽한 탄력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해가는데,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로 절정을 이룬 후의 이야기는 탁 풀어져 너무 설익은 화해와 봉합을 조장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크게 볼 때 다소 헐거운 구성에 비해 인간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섬세한 묘사는 매우 탁월하고 풍부하며, 한 인간에 내재한 다양성이 박진감 넘치고 생동감 있게 그려져 읽는 동안의 몰입도는 꽤 높았다.
실은 이야기를 읽으며 내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네팔이 아닌 파키스탄 사람, 주인공 카밀의 생김 묘사와 딱 맞지 않음에도 읽는 내내 자꾸만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가 없어, 중반 이후부터는 아예 머리 속에서 그가 주인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 주인공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못내 궁금해하고도 있었는데, 며칠 전 우연한 대화 속에서 누군지 알게 되어버렸다. 역시, 픽션과 현실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느끼며... 한편, 불행한 결말 속으로 뛰어드는 주인공과 달리 현실의 그는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의 삶이 하나 같지야 않겠지만, 짧지 않은 이야기 속의 두 문장이 아직은 그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초반부, 신우의 집에 주저앉아 살려고 찾아온 카밀과 사비나가 달랑 손가방 하나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누는 신우와 그들의 대화다.
"아무 것도 없이 어떻게 살 거예요?" "언제나 이렇게 살아왔는걸요."
2007-09-27 03:37,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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