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반나절쯤 퍼붓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빗속에서 시내를 헤맸다. 연일 머금은 공기의 물기 탓인지 마음도 괜히 찰랑거려서, 나가서 하는 일과 별개로 심사는 내내 말랑하고 여릿했다. 해서 들고나간 책 '끌림'은, 폭 빠지기에는 조금 모자라고 그렇다고 외면하기는 어려운 당김이 있었다. 혼자라서 좋아, 혼자가 좋아, 혼자 걷는 길에서는 엄살이 심해져... 맞다, 맞다. 책장을 넘기며 잊고 살았던 서른 이전의 원형질을 조우하는 느낌, 괜히 마음이 산란해진다.
한남동과 을지로, 광화문과 명동을 축축해진 몸과 마음으로 거닐면서 내심, 이렇게 간질간질한 것들이 영화에서 확 폭발해버렸으면 싶었다. 어딜까 어딜까 궁금해하며 찾아간 CQN명동은, 기대했던 새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렇게 되었구나, 와봤던 영화관도 기억 못할 만큼 늙어가고 있구나... 별 것도 아닌 망각의 확인이 괜히 좀 서운했다.
때로 불쾌하리만큼 찐득하고 찝찝한 계절이 여름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청춘의 신열을 발산하기에 가장 마땅한 때가 또 여름인가보다. '영원한 여름'이라니... 정말 안이한 제목이다 싶으면서도 굳이 보겠다고 달겨든 것도 웃기긴 하다. 그 덕인지 영화는 고맘 때의 싱그럽고 찬란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시간, 딱 그만큼 내게 헐렁했다. 전단지에 떡하니 쓰인, 11회 piff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과장은 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다.
과잉행동 장애를 달고 사는 통제불가의 외로운 소년이 있다. 전학 온 여자애가 자리에 앉자마자 가위로 머리칼을 싹둑 잘라버린 벌로 책걸상과 함께 운동장에 덩그라니 내몰린 경험이, 안 그래도 외로운 아이의 가슴 깊은 곳에 공포와도 같은 원체험으로 더해졌다. 제발 나 좀 봐달라는 온몸의 절규는 오히려 모두의 거부를 불러 아이는 왕따를 면치 못하지만, 또래와의 어울림을 유일한 처방전으로 내민 의사 덕분에 다행히 단 하나의 친구를 얻게 된다.
가까이에 나무랄 데 없이 반듯하고 모범적인 한 소년이 있다. 같은 반의 왕따에게 별 관심 없지만, '수호천사'가 되어주라는 담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그 날부터 유일한 친구를 자처한다. 반 친구들 모두가 무시하고 외면하는 외로운 아이의 단짝이 되어,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해변을 달리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두 소년은 함께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년들의 우정과 사랑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잡은 한 소녀가 있다. 매개자이면서 방해자인, 그러면서도 두 소년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포용하는. 그저 그 나이대의 소녀이면서 한편 외로움과 사랑에 피폐해가는 소년들의 대지 같기도 한 소녀. 알 듯 모를 듯한 무표정이 도발적인 소녀와의 앞서거니 뒷서거니 일탈을 통해 소년들은 '정말 좋은 친구'라는 말 속에 감추어왔던 서로의 존재감을 절절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게 외로움인지도 몰랐지만 사무치게 외로웠던 소년과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선생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던 소년,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삶에서 서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깊어지고 마치 둘로 나뉜 한 사람인 양 그들은 늘 함께 있다. 외로웠던 소년은 단 하나의 친구가 지켜보지 않으면 특기인 농구가 잘 되지 않고, 여전히 모범생인 소년은 시험 전날의 공부가 급해도 정신 사납고 산만한 친구의 방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두리번거린다. 잠시라도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긴장을 머금은 표정이 마침내 서로의 실재를 확인할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단 두 사람인 것처럼. 그야말로 단짝이다. 세상을 알만큼 커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 문득 돌아보니 없어져버린 말, 던져버린 기억도 없는데 사라져버린 말. 단짝,이라는 말이 그렇게도 따뜻하고 애틋한 울림을 가졌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저 성장통이었다고 지난 후에 담담히 말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앓을 때는 얼마나 거대하고 압도적인가. 순진하게 우정이나 친구 따위를 되뇌이던 때를 지나며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하면, 마주 보고 우정이라는 말을 나누는 것이 수줍고 어색한 시간이 온다. 둘도 없는 친구와 만들어온 세상보다 각자의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친구, 영원한 우정 따위를 대신해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선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며 겨우 잊었던 외로움의 공포다. 줄곧 한몸처럼 지내온 친구가 어느 날부터인가 걷잡을 수 없는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고통, 지극한 외로움을 채워주고 마침내는 사라지게 만들어준 친구와의 관계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묘한 긴장의 기류. 마음 속 깊은 곳에 비밀과 고뇌를 품은 청년들의 관계는 균형을 잃고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장의 대가는 제법 가혹하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아픈 후에는, 언제나 아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 그대로만 있으면 아무 바랄 것 없을 때의 평온함 같은 것은 이미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의 혼란이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욕망은 사납고도 서럽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의 비밀을 고백하는 바닷가의 청년들, 그저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묵묵히 바라보기에는 날카롭고 저미게 떠오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