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19. 03:59




참으로 적당한 영화였다. 내가 이미 늙어 그런지 살인미소 박해일 운운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비루하고 극악스런 현재로부터 훑어들어간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은 '두근두근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은 마음을 꽤나 아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돈과 욕이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세월의 풍파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모진 생활력 뿐인 엄마에게도 풋풋한 십대의 가슴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하기만 해 인생 말년, 잔뜩 쳐진 어깨에 근심어린 얼굴로 아내의 구박을 달고 사는 아버지도 그 순수와 선함이 하늘처럼 높고 맑게만 빛나던 청춘의 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거짓말같이 순정했던 시간들, 떠올리면 차라리 눈물이고 한숨이어서 오히려 더 멀리만 하고 싶은 그런 날들이 생활이 되어버리면 붙잡고 매달릴 것은 결국 현실일 뿐인 걸까. 사실 불과 서른 해를 살아온 내게 가장 와닿은 영화의 메시지는, 너무나 쉽게 기적같은 지난 시절이 되어버리는 추억의 공허함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부정적인 감정이입이겠지만,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싸늘히 변해버린 마음과 관계. 바닥까지 내려가 차고 올라온 전환점이었다고 애써 생각하지만, 심저에 남은 상처까지 어찌할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아름다웠어' 라고 말할 수 있었던 몇 번의 경험과는 이미 차원이 달라져버린.
 

암튼, '내 마음의 풍금'과 'I am Sam'의 이미지와 너무 겹쳐져 배우들의 연기에서 별 새로운 것은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해맑음이 너무나 어울리는 전도연의 해사한 미소와 나이 대비 심히 넉넉한 박해일의 푸근한 웃음 그리고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원한 우도의 풍광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영화가 들려준 이야기와, 내가 들은 이야기의 서글픈 간극 만큼이 아마 혼란스러운 지금의 내 모습이겠지.



2004-07-13 00:4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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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