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7. 22:23

 

롯데시네마는 별로 간 적이 없는데, 작년에 신도림 아르떼관에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러 갔다가(스티커 받으러 갔다가;;;) 자막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앞쪽 출입구로 누군가 들어와서 불을 확 켰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불쾌해서 더욱 염두에 없었다. 그런데 통영에 단 두 곳 있는 극장 중 cgv는 연말 리뉴얼이라더니 문을 열지 않고, 나머지 하나가 롯데시네마. 그래도 혹시 뭔가 볼 만한 걸 하는가 싶어 앱을 살펴보다가 [걸] [미스터 존스] [완벽한 가족]이 상영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 7시 반으로 [걸]을 예매하고, 느긋하게 2시간쯤 걸으면 되겠다 싶어 길을 나섰다. 서울은 폭설에 한파에 난리라고 들었고, 통영은 아침에 잠깐 진눈개비 같은 게 흩날렸고 평소보다는 추웠지만 그래도 영화 보러 갈 만은 한 날씨라고 생각했다. 

9월에 한 달 살 때, 영화 보다는 그냥 통영에 있는 영화관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오, 문희]를 봤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어렸을 적 연극 [어머니] 초연 주인공이었던 나문희 배우의 연기를 펑펑 울며 보았었고 나문희 배우에 대한 호감이 있어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평일이었고 낮이었고 cgv, 관객은 나 하나였고 발열체크도 티켓 확인도 없었다. 어쨌든 cgv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어서 그래도 통영에 cgv 있는 게 어디냐, 천지가 개벽해서 아트하우스관 하나 생기면 좋겠다는 되도 않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지금도 한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평소보다 긴 산책에 시간도 많아서, 잘 가지 않던 길로 부러 돌아가다 보니 귀여운 물고기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작은 쌈지공원 같은 공터였는데 공간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했고, 눈을 들어 보니 바로 뒤편에 교회 이름과 십자가. 아... 오병이어의 기적을 형상화한 건가? 암튼 물고기들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그러나 오병이어는 5전병과 2물고기였다는 깨달음과 함께, 귀여우면 됐지 뭐. 

조형물을 지나 운하 쪽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오늘 나는 영화를 혼자 보게 될 것인가 싶어 앱을 확인했는데 역시 나 말고는 예매자가 없다. 바닷가로 나오니 바람이 꽤 차갑고, 30분 이상 걸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과연 영화관에서 자막 마지막의 제작사 로고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청소하시는 분이나 관리하시는 분이 자막 올라가기 시작할 때 들어와서 불을 확 켜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오늘은 날이 많이 추운데, 나 하나 안 보면 그들 모두의 귀가시간이 좀 당겨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사실 춥기도 무지 추웠다. 

해저터널에 가서 생각해 보자, 포르투나 호텔 앞을 걷는데 역시 춥다. 주말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니 위의 세 영화가 모두 있다. 순간 결단을 내리고 예매를 취소했다. 예매가능좌석 89, 그러니까 오늘 이 영화는 상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바로 집으로 가기는 좀 아쉬워서 봉평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도 불을 밝히고 있는 내성적싸롱 호심을 지나 봄날의책방. 홀수를 좋아하고 7을 좋아해서, 실은 7일에 올해의 첫 영화를 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 뭐라고 해야지 싶었다. 내성적싸롱 호심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할까 하고 지나며 봤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부담스러워. 봄날의책방에 가서 뭔가 의미 있는 책을 한 권 사야겠다. <세상에서 지켜진 아이들>이 있다면 좋겠다 싶었는데 없었고, 카운터 앞 매대에 놓인 신간이 있어 한 권 사왔다.  

통영에 내려온 후 잦은 전화로 마음을 써주는 통영산 지인은 자주 통영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영에 올 때면 서호시장 고향식당에 꼭 들러 시락국이 나오는 백반을 먹는 그와 함께, 이사한 다음 날 나도 그 밥을 먹었었다. 된장을 먹지 않는 내게 시락국은 음식일 수 없었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밑반찬과 벌써 이름을 까먹은 생선조림, 구수하고 뜨끈한 누룽지는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집밥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게는 집밥로망이라는 게 없고, 냉장고를 부탁하느라 며칠 연속으로 같은 음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람직한 식습관의 보유자이며, 미식이나 식도락과는 거리가 먼 다행스럽고도 싼 입맛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백미'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어쨌든 '통영'이 들어가 있는 책이라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동네서점 방문자의 예의도 갖추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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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