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1. 1. 4. 23:36

 

몇 년 전 충무교를 도보로 건넌 적이 있다. 걸어서 다리 건너는 걸 좋아하고 기회가 되면 한강이든 어디든 건너곤 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시작했는데, 차도와 인도 사이 난간이 없고 인도폭이 좁아서 길지 않은 다리인데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3년 전 여름, 성산대교 남단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인 뒤 한동안 다리는커녕 긴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걸어서 다시 다리를 건너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이후 집 근처 오목교와 보행자신호등이 잘 되어 있는 양화대교, 보행자가 많은 마포대교 정도가 걸어서 건넌 다리다. 지난해 9월 통영에 한 달 살면서도 통영대교와 충무교를 건널 용기를 내지 못해 늘 해저터널을 통해 다녔다.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것도 있는데, 예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고소공포가 상당히 심해졌다. 우도 비양도의 3미터도 채 안 될 봉수대를 오르다 중도에 포기했고, 작년 1월 속초에서는 등대전망대를 오르는 가파른 철제계단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해저터널보다는 충무교나 통영대교를 건너고 싶지만, 여전히 혼자서는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괜히 오늘은 한 번? 싶은 마음에 산책 방향을 충무교 쪽으로 잡았고, 대건성당을 지나 자연스럽게 미수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내려갔다.

통영대교가 한 눈에 들어왔다. 9월에 한 달 살았던 곳은 저 너머 인평동이다. 막막한 마음으로 싼 원룸을 예약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가 아직은 안 되는 탓에 바리바리 짐을 부치고 싸들고 찾아갔던 곳. 에어컨 고장으로 다음 날 방을 바꾸고 짐들을 옮기고 하느라 시작은 어수선했지만, 나름 한 달 잘 살면서 통영을 걷고 집을 구하고 했었다. 산책이나 외출을 할 때면 늘 통영대교 아래를 지났는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 한 분이 같은 자리에 앉아 계셨다. 해질녘 통영대교 아래 해안로와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책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아니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그 분만은 같은 옷을 입고 운하 반대편을 바라보고 계셔서 괜히 더 눈길이 갔던 것 같다. 말이라도 붙여볼까, 사탕이라도 건네볼까 어줍잖은 생각을 잘 참아 넘기고 마음의 인사만 곱씹고는 했는데... 통영대교를 가까이서 보니 그 분 생각이 났고,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자전거교육장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전에도 있었나 싶은 낙서가 눈에 띄었다. 통영에는 이런저런 벽화가 참 많은데, 그것은 벽화는 아니었고 낙서도 아니었다. 절규였다, "사랑한다"는 절규. 둘러쳐진 안전띠 때문에 더 처연해보였다. 그리고 제주해녀상, 처음 보고 신기해하며 제주 지인이 떠올라 오랜만에 연락했던 기억이 났다. 얼마 전 연락에 통영 이주를 알렸더니 통영에 갈 데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제주에 가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그를 여기서 만나면 참 반가울 것 같다. 우리집에서 lp로 노래 들으며 이야기 나눴던 추억이 있는데, 실은 좀 심심도 하다는 말에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라고 말해줬다. 내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고 말해주는 사람, 그는 내가 알고 믿는 좋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9월에는 어수선했던 충무교 아래 해안로도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김춘수유품기념관까지 바다를 보며 걷다 보면 재미있는 게 나온다. 마주칠 때마다 궁금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하고, 뜬금없지만 이제는 없어진 합정역 '축지법과 비행술'이 떠오르기도 하는 'GUESS'집. 그 앞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인지 뭔지를 정리하고 계셨는데, 여기는 뭔가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냥 알아서 짐작들 하라고 붙여놓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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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