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8. 9. 19:39


6월에 함께 중고차 사러가주고 7월에 와서 조수석 인질이 되어주기로 했는데 코로나19에 확진되어 미뤘던 약속, 부산의 G가 어제 왔다가 오늘 갔다. 상반기로 일을 그만두고 간만에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시기여서 일찌감치 출발해 도착한 덕에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얼마 전 M이 보내준 어엿한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집을 나섰다. G가 해수욕을 좋아하는 터라 거제의 덕원해수욕장으로 갔는데, 차 없을 때도 기웃거리던 캠핑용품을 사모으기 시작한 내 차에는 의자 두 개와 원터치 텐트가 실려 있었지만 쓸 일은 없었다.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와 물에 들어갔던 G의 해수욕은 해파리 때문에 십여 분으로 끝났고, 나는 M이 보내준 책을 읽으며 얼마만인지 모르겠는 해수욕장에서의 여유를 잠시 즐겼다. 

우리는 다음 날 '한산대첩 승전항로코스' 해상택시를 탈 예정이고, G는 8월 하순 지인들과 한산도 1박 여행 예정이고, 나는 cgv vip쿠폰이 있는 터라 덕원해수욕장을 출발해 cgv거제로 [한산, 용의 출현]을 보러 갔다. [명량]은 언젠가 추석 연휴에 tv로 보았지만 별 감흥이 없었고, [한산, 용의 출현] 역시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통영에 살고 있으니 한 번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52년이었는데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잡은 게 다음 해이고 통영으로 옮겨온 건 1604년인가 하니, 장소 자막에 삼도수군통제영이 나오기는 했지만 영화에서 명확히 일별할 수 없었고 뭍씬의 주요 배경은 부산포였다. 오직 통영의 흔적을 찾기 위해 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영화 자체도 왜 수백 만 명이 보는지 의아할 만큼 퀄리티가 떨어져서 쿠폰으로 보기에는 알맞았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저녁 식사 겸 집에서 멀지 않은 라인도이치 브루어리에 갔다. 술을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친한 지인들 대부분은 즐기는 편이어서, 운전을 하게 되며 기대한 부분 중 하나가 지인들이 집에 놀러왔을 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마음 편히 술 한 잔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라인도이치 브루어리는 예전에 통영해상관광공원에서 사량도 여객선 터미널까지 산책하며 알게 된 곳,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늦어 피자만 주문이 가능했고 G는 수제맥주 샘플러 3종을 마셨다. 이미 어둠이 내려 창 밖의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회식인 듯 십수 명의 사람들이 여러 테이블에 나눠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서 블로그에서 봤던 근사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G에게서 특별한 반응이 없었던 걸로 보아 맥주도 그저 그러하였나 보다 싶다. 그러나 앞으로는 술 좋아하는 지인에게 통영까지 찾아온 고마움을 전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은 간단히 빵을 챙겨 먹고 해상택시를 타러 갔다. 야경투어만 두 번 탔었는데 모두 만족스러워서 '한산대첩 승전항로 코스'는 어떨지 궁금했고, 마음이 한껏 들떴다. 거의 마지막에 승선했는데도 비어 있는 제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출발하며 목격한 옅은 무지개 덕에 마음이 들뜨다 못해 부풀어버렸다. 선장님의 명쾌하고 친절한 설명, 잘 어울리는 음악,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스릴까지 야경투어에서 느꼈던 해상택시의 매력은 낮에도 다르지 않았다. 미처 몰랐는데 이 코스에는 제승당 1시간 스탑오버가 포함되어 있었고, 여객선 탈 때와 달리 제승당 입구에 하선하는 신선함과 빵 챙겨 먹고 나온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G와의 약속을 어제오늘로 잡은 이유는 한산대첩축제 기간 이벤트로 단돈 만 원에 해상택시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는데, 전날 본 [한산, 용의 출현] 덕에 선장님의 설명이 더 쏙쏙 들어온 터라 내친 김에 조선군선도 관람하기로 했다. 날은 덥고 배는 고팠지만 다행히 통영시민은 무료여서 보람스러웠고, 군선 안은 덥고 여기저기 설명은 많았지만 뭔가 조야했고, 통제사가 208대까지 있었다는 것과 제해권을 재해권으로 쓴 오타 등을 발견했다. 주마간산이나마 조선군선 네 척에 다 들어가보고 나니 어쩌다 한산대첩 기념 여행을 한 셈이 됐고, 머지 않아 한산도에서 1박을 할 G의 화룡점정을 응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 주차장 사장님이 주신 상추와 통게하 사장님이 주신 빨간 사과 등을 넣은 샐러드와 감바스, 커리와 난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난은 브런치스타일을 좋아하는 G를 생각하며 티아시아에서 새로 나왔다기에 한 번 사본 건데, 인도네팔 레스토랑에서 먹던 난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 됐고 방부제는 덜 들었겠지만 수입한 또띠야가 오히려 나은 느낌이었다. 아무려나 이웃이 준 재료로 지인과 먹는 점심은 낯선 곳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이주자가 된 듯한 착각을 더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G의 차를 타고 나와서 공간에 들러 수다를 떨다가 5시 반쯤 나왔고, 미용실 앞에 나를 떨궈준 G는 얼마 전 시작한 8시 농구교실로 떠났다. 

G를 생각하면 나는 두 가지가 고맙다. 15년 전 어느 밤 그냥 생각이 났다며 걸어온 전화 그리고 10년 전쯤의 어느 밤 단도직입으로 날린 한 마디 “말 좀 그만해”. 2007년 2월 여수화재참사 현장에서 만나 두 달 가까이 함께 지내며 활동하다 무력감과 열패감을 잔뜩 안고 각자의 단체로 복귀해 일하던 시절, G가 먼저 연락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인연은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2013년쯤, 마음으로 바라던 현장에서 일하게 되어 잔뜩 고양된 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게 던진 G의 한 마디는, 그 순간에는 민망하고 멋쩍기 그지 없었지만 덕분에 편하거나 친하더라도 적당히 말하려는 의식을 갖게 만들어줬다. 물론 갈수록 많이 잊는 G의 기억 속에는 이 두 가지 모두 없을 것이지만. 

G도 인정한 바 이번 1박 2일은 매우 알차고 짜임새 있는 여행이었다. 몇 년간 조울을 오가며 최선을 다했지만 극복할 수 없었던 무언가로부터 받은 울화를 열심히 발산 중인 G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공허와 불신을 남긴 ‘빅실버’와의 10년 인연에 대해 몇 달간 혼자 곱씹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일말의 불편함 없이 순수하고 흔쾌하게 함께인 시간이 즐거운, 몇 안 되는 지인이어서 더 완벽한 1박 2일이었다. G와의 다음 만남은 무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공연과 다음 날 부산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부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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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