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7. 23. 16:15

 


자정이 조금 넘어 M이 집 근처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실컷 잤다며 지가 마실 맥주 두 병에 내가 사려던 과자 한 보루까지 흔쾌히 결제하고, 새벽 세 시경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아침에 일어나 공간에 갔다가 점심 먹고 통영터미널에서 옥포행 버스를 타고 대우조선 앞으로 가는 게 M의 계획, 나보다 젊고 체력도 좋다지만 불편한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수면 포함 열두 시간쯤의 체류를 위해 굳이 통영에 들러준 게 고마웠다. 지난해 봄 놀러와서 나흘 정도 머물렀고 추석에는 이사한 그의 집에 가서 하루를 자며 놀았다. 활동할 때 한 달에 두어 번은 만났으니 일년에 한두 번은 꽤 뜸해진 것이지만, 완전 또래 친구도 아닌데 멀리에서도 이어지는 인연이 나로서는 소중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집을 나섰다. 그가 고른 아점 식당은 니지텐이었는데 주차장 가는 길에 보니 이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간에 들러 구경하고, 면이나 칼국수를 먹고 싶다기에 얼마 전 알게 된 백서냉면으로 갔다. 나는 오이혐오자이므로 밖에서 냉면을 먹지 않고 맛도 모르지만 성의 있고 좋은 식당이라고 알려진 집이어서 가봤다. 점심 시간 전이라 손님이 별로 없어 오이를 따로 달라 부탁드리는 게 실례는 아닌 분위기였고,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냉면과 만두를 맛있게 먹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마침 들어온 손님들이 계셨고, 가방을 챙기느라 조금 늦게 일어선 M이 깜짝 놀라기에 돌아보니 방금 들어온 이들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세상에나.

 

깜짝 놀라고 반가워서 어수선하게 인사를 나누고 밖에서 통화하고 있는 K까지 확인하며 더욱 놀라워졌다. 그들은 나도 인사 정도는 나누던, 작년에 통영에 내려와 정착한 J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거제 희망버스 가는 길에 식사를 하려던 중이었다. 덕분에 M은 그들의 차를 얻어타고 거제로 가기로 하였고, 식사 후에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다. 원래 카페에 갈 예정이었으나 애매해져서 길가 벤치에서 떠들다가 다시 공간으로 와서 수다를 떨었다. 얼마 후 1박 2일로 다른 지역에 다녀온 공유파트너가 도착했고, M이 집으로 가져온 여러 가지 중 남해안여행엽서키트를 통해 M의 친구와 공유파트너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시 세상에나.

 

평소 M은 날씨요정을 자처했고 함께 여행하거나 무슨 일정이 있을 때 예보와 달리 날씨가 괜찮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부로 타이밍요정을 겸하게 되었다. 니지텐 웨이팅을 주장했다면, 백서냉면에서 일 분만 일찍 나왔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놀랍고 신기한 조우. 네 사람 모두 현장에서 마주치면 인사 나눌 정도의 관계였지만 마음속 저어함이 전혀 없는 이들이어서 꽤나 반가웠고, 내가 통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그들 역시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놀라워하고 반가워했다. 하여, 몇 년 전 군산 여행 함께할 때 사진 찍기를 강권하는 M에서 미친년이라는 돌직구를 날렸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들이대는 카메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한결 줄어들기도 했고 잠시지만 오롯이 통한 듯한 빤짝하는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기도 했는데, 이런 마음이 든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들과 헤어져 M과 수다를 이어가며 놀랍다, 신기하다, 웃기다 등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M 배웅 겸, 집에서 챙겨온 천도복숭아와 비장의 달고나초코바를 챙겨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긴 그들에게 갔다. 오랜 투쟁 후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이따금 포털에서 불안한 미래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되는 K의 사업장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퇴직 후 통영에 내려온 J에 대한 이야기도, 몇 주 전 아파트 같은 층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지만 설마 하며 넘어갔던 밥차 연대하던 이가 정말 같은 층에 살고 있고 얼마 전 통영에서 식당을 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J와 친해 통영에 가끔 온다는 K는 다음에 올 때는 연락하겠다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신선했고, 아무 상관없었고 아직은 상관없지만 언젠가 달라질지도 모를 통영 이주자들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는 한다.

 

약간 마술 같았던 오늘의 몇 가지 일들은 M의 짧은 방문과 의도치 않은 요정질 덕분. M은 내가 정식으로 책방을 오픈하면 다시 내려오기로 했는데, 예기치 않은 깜짝 반짝임을 선사하는 그 요정력 변치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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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