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9. 7. 19:55

 

 


오늘은 어떤 기념일이다. 흔쾌한 기념일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갈수록 나만의 흔적을 새기고 싶은 날. 원래 대략 계획하고 캘린더앱에 기록한 게 있었는데 책방 오픈 준비와 연동된 거여서 미뤄진 터, 누구한테 얘기한 것도 아니고 계획이랍시고 기계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어설픈 시도가 될 것 같아 마음을 비웠다. 기념일도 기념도 나만 아는 거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건 아쉬울 것 같아 작업 관련해서 외근하러 나가는 김에 지난달 중순부터 차 계기판에 떠 있는 ‘oil change’를 해결하는 걸로 시작했다.

 

하여 첫 번째 기념은 엔진오일 교환, 내가 한 일은 정비소에 차를 맡긴 것뿐 그저 기능적이고 필수적인 일이지만 나한텐 생애 처음이니 기념 삼기로 했다. 엔진오일을 교환하면서는 오랜만에 충렬사 앞 백석 시비에 추석 인사를 드리고 서피랑을 둘러보았고, 차를 찾아서는 동피랑과 강구안 일대를 둘러보았다. 통영을 드나드는 내내 휑하게 비어 있었던 이문당 건물에 오픈한 베이커리카페가 괜히 반가웠고, 동피랑에서는 2년마다 바뀐다는 벽화 작업 중인 분들을 곳곳에서 마주쳤다. 차 안에 휴대폰을 두고 나와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작업 관련 확인 사항 중 하나는 평인일주로 어디쯤 있었다. 운전한 지 두 달 반 가까이 됐지만 혼자서 멀리 갈 엄두는 여전히 못 내고, 시내에 나갈 때도 내비 안내를 무시하며 굳이 충무교를 건넌다. 연수할 때 통영대교의 빠른 속도와 커브가 무척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각인된 결과이자 안주하는 버릇 덕분이다. 시간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언젠가는 혼자 넘어서야 할 일이어서 나갈 때마다 내심 떠올리지만 쉽지는 않다. 오늘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통영 이주하면서부터 생각했던 새마을금고 계좌 개설이 떠올랐다. 통영대교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길어올린 방어적 기억일 수도 있지만, 오늘이면 적당하겠다 싶었다. 시간은 4시가 다 되어가고 가능하려나 싶으면서도 일단 새마을금고 도봉지점 쪽으로 차를 몰았다.

 

2017년이었나, 여행 와서 걷다가 간판에 쓰인 '도봉'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끼며 사진을 찍었었다. 지금은 강북구가 되었지만 태어나 15년쯤 살았던 도봉구, 막연하게 통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도봉'이라는 단어는 어떤 인연을 예비한 것 같은 착각을 선사했다. 도봉은 아마도 도남동과 봉평동의 첫 글자를 딴 조합일 텐데, 지금의 나는 도남동에 살면서 봉평동으로 출퇴근 중이다. 거래은행의 지점은커녕 현금인출기도 미륵도에는 없기 때문에 통영에서 가장 밀도 높은 은행인 새마을금고 계좌를 만들어야겠다고 이따금 생각하며 계속 넘어갔는데,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 다행히 지점 오픈은 4시 30분까지였고 오늘자 '도봉'지점 계좌를 만들었다, 두 번째 기념.

 

즉흥적이었지만 원하는 날짜가 찍힌 새 통장을 만들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도남관광지에도 확인할 게 하나 있어 트라이애슬론 광장에 주차를 하고 잠시 외근, 광장은 연수 첫날 죽어라 안 되는 커브 연습을 했던 곳이다. 두 달 반 동안 이렇게 운전을 조금밖에 안 하고 실력도 안 느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차를 마냥 세워놓고 있지 않는 것만도 나로서는 기특하기 때문에 버벅거리던 기억이 생생한 현장에 여유롭게 주차를 하니 매우 흡족하였다. 실은 흡족을 넘어 이상한 자신감이 샘솟아서 내친 김에 통영대교를 건너기로 가상한 용기를 내버렸다. 평인일주로 어디쯤의 목적지에 가기 위해 예전 한달살기했던 인평동을 지나 구불구불한 해안로를 나름 드라이브, 비록 근처까지 가서 찾지 못해 그냥 돌아왔지만 나홀로 통영대교 왕복이라는 숙제 하나를 해결하였다.

 

기념이랍시고 한 게 엔진오일 교환, 신규계좌 개설, 통영대교 왕복이라니 좀 없어 보이지만 소소한 자로서 만족스럽다. 내년엔 어떤 기념을 해볼까... 지금은 여권도 없는 주제지만 해외여행 중이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해본다. 아니면 날짜 맞춰서 새 여권을 만들까, 그거 맞추는 게 가능한 건가? 역시, 여권은 미리 만들고 해외여행 중이면 좋겠다. 가고 싶은 곳은 유럽이나 남미지만 우선 가까운 블라디보스톡, 혹은 가마쿠라나 하코다테라도. 이뤄지도록, 주문을 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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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